[교단일기]꼴찌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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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꼴찌의 행복
  • 경상일보
  • 승인 2023.07.2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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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건희 대송고등학교 교사

어리기만 했을 땐, 시간의 힘으로 많은 것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했다. 스무 살 대학생만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고 나이 서른만 되면 내 삶에 책임질 수 있는 평화가 오는 줄 알았다. 그런 생각을 품은 지 10년 20년이 흘렀고, 나는 성인이 되고 내가 바랐던 꿈도 이루었지만, 내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다. 마음속 꿈틀대는 갈증 해결을 위해 일상에서 배우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영어 학습법을 만났다. 중학교 1학년에 시작한 영어 공부를 교직 생활 10년이 지나서도 계속하던 중, 7년 전 처음으로 ‘새로운 통합영어 학습법’을 만났다. 고등학교 수능 영어 준비로 독해 수업만 했던 나에게, 영어를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을 통합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언어 습득 방법은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5년 전부터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영어를 다시 공부했다. 설렘보다 막연하고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공부가 계속되어도 나의 부족함을 직면하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새로운 배움을 시작할 힘을 내는 것은 늘 어려웠다. 특히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5년 가까이 배우면서 많은 부분 성장하고 수월해졌지만 언제나 내가 꼴찌인 듯하고 아는 바가 없는 것 같다는 조바심에 마음이 힘들기도 했다.

비슷한 경험이 작년에도 있었다. 작년 3월, 새 학교 첫 출근이었지만 내심 자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지만, 교직 경력 15년의 세월을 의지 삼아 잘 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학교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다. 대부분 선생님의 수업 진행과 학생들을 대하는 모습, 그리고 업무 처리 등 모든 것들이 내가 생각했던 기준보다 훨씬 높게 느껴졌다. 누가 나에게 강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고 그 기준을 따르고 배워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마치 내가 선생님 중의 꼴찌라도 된 듯한 기분이 일 년 내내 옆에 있었다. 새롭게 배우겠다고 하면서도 나의 과거 기준에 따라서 쉽게 하고 싶었던 마음도 들었고,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때 구겨지고 자존심 상했던 경험도 많았다. 몇 번의 설명을 듣고 배워도 실행이 잘 되지 않아 나의 무능함을 비난했던 순간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스쳐 가듯 잠시 들었던 영상의 한 줄 설명으로 내 고민은 끝이 났다. 지금 내가 몸담은 공간에서 내가 제일 잘나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더 이상 배울 바가 없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발전과 성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마치 꼴찌처럼 여겨지더라도, 나의 부족함이 여실히 보이더라도 그 안에서 배움을 계속 이어간다면 나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과 그리고 진정하고 확실한 성장과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에 갑자기 꼴찌의 행복함이 느껴졌다. 꼴찌도 없고 일등도 없겠지만 꾸준히 배우고 성장하는 행복함만은 나의 것이 되리라는 확신이 반갑다.

김건희 대송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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