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어느 하숙집 모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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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어느 하숙집 모임 여행기
  • 경상일보
  • 승인 2023.09.0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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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준 변호사 제55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올여름은 8월 중순까지 폭염이었다. 태풍 ‘카눈’이 지나간 다음날인 8월12일(토), 아침 서둘러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처와 함께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전용차선 덕분에 5시간 정도 달려 경남 통영에 도착했다. 2박 3일간의 여정이다. 고향인 그곳에서 치과병원을 하는 이(李)원장 부부가 숙소인 콘도에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50년전 대구의 고등학교 시절, 같은 학교 같은 하숙집 친구 9명이 부부동반으로 모였다. 한 사람은 미혼이라 혼자 왔다. 매년 여름 돌아가며 한명씩 호스트가 되어 각자의 고향(부산, 울산, 통영, 흥해 등)이나 주거지 인근으로 초대한다. 벌써 9년째다. 유례가 없는 하숙집 모임일 거라고 우리끼리 얘기하는데 모임 이름도 하숙집 주인 아들의 이름을 따서 ‘무곤네’ 모임이라 붙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바다는 다음 날로 기약하고 횟집으로 갔다. 남해안의 싱싱한 수산물로 채워진 저녁상이 푸짐하다. 이원장의 정성과 통영의 인심이 느껴진다. 광어, 도미, 전어, 멍게, 해삼, 소라 등 해진미(海珍味)다. 술잔이 돌면서 마음은 까까머리 고교 시절로 돌아간다. 부모 슬하를 떠나 객지 생활을 시작할 때다. 사춘기 정서보다 외로움이 더 컸으리라. 공부도 했지만 하숙집 밥상머리에서 반찬을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으려 했던 치기어린 시절이었다. 그때를 얘기하며 재미있어 한다. 전에 만났을 때 했던 얘기를 또 한다. 전에 같은 얘기를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가 아니다. 최근에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도 아니다. 추억하고자 다시 얘기하는 것이다. 추억담은 파도 소리 들리는 숙소에서도 계속되었다.

8월13일(일), 아침 서호시장내 3대째 운영한다는 식당으로 갔다. 쫄복국의 맑은 국물은 전날의 숙취를 말끔히 없애주었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연화도·욕지도행 배에 올랐다. 뱃전에서 바라본 한산도 앞바다는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바다다. 평화로운 푸른 바다에 뿌려진 붉은 피는 무엇인가.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다툼은 종종 전쟁으로 치닫는다. 언제 태풍이 지나갔느냐는 듯 물결은 잔잔하다. 다도해의 섬들은 이 바다에서 일어난 인간의 역사를 기억할 것이다. 해수일미(海水一味)의 바다. 인간사 영욕의 찌꺼기와 어리석음도 모두 받아들여 한가지 맛으로 바꾼다.

연화도 선착장에 내려 연화사에 들렀다. 주지 스님과 차담을 하면서 섬에 대해 들었다. ‘연화(극락)세계를 알고자 하면 처음과 끝을 부처님께 물어 보라(欲知蓮花藏頭眉問於世尊)’는 말에서 섬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500여년전 스님 한 분이 이곳 토굴에서 돌멩이 한개를 부처삼아 도를 닦다가 입적하였는데 유언에 따라 수장을 하니 연꽃같은 상서로운 기운이 떠올라 연화도인의 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도 들었다. 사명대사가 연화도에 들어와 바위굴 움막에서 정진해 득도했다고 한다. 사명대사가 누구인가. 억불의 시대에 승병을 일으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지 않았던가. 걸어서 토굴과 돌부처, 바위굴을 둘러보았다. 파도에 깎인 용머리 해안은 섬의 절경이다. 연꽃세계 같은 아름다운 섬에서 그처럼 고단한 수행과 정진이 있었다 하니 세상사나 자연의 이면에는 감춰진 심연이 늘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여객선으로 1시간 걸리는 망망대해의 섬, 한사람이 누울 공간에서의 수행의 깊이와 고뇌, 깨달음의 경지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는가.

통영으로 돌아오는 오후의 바다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남빛을 발하고 있다. 뱃길에 쪼개지는 물보라가 싱그럽다. 스쳐 지나가는 섬들은 평화롭지만 하오의 태양에 지쳐 있다. 이날 저녁 통영항 횟집에서의 음식도 도미, 방어, 전갱이 등 전날과 다름없다. 해산물의 천국 답다. 내년 이맘때는 중국 상해에서 모인다. 사업상 그곳에서 살림하는 친구 부부가 초청한다니 또 다른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다음날인 8월14일(월), 오전 운동을 한 후 상경하는 버스안에서는 피곤했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추억과 역사의 긴 시간 여행으로 인한 상념의 여운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바다, 사명대사의 연화도에서 광복절을 앞두고 돌아본 여정은 기억속에 저장된다. 추억은 추억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박기준 변호사 제55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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