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29일, 미국 백악관과 보건복지부는 공공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의약품들 가운데 정부와의 협상을 거쳐 판매가격을 낮추어야 하는 10개 제품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는 2022년 8월 발효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것인데, 가격 협상 결과 인하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 제약회사들은 2026년 1월1일부터 합의된 약가로 의약품을 공급해야 하고, 협상에 불응하는 경우 해당 의약품은 공공의료보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거나 해당 의약품 매출액의 최대 90%에 대해 과세되는 불이익 처분이 따르게 된다.
약가 협상의 법적 근거가 된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핵심 공약인 기후변화 대응, 건강보험 확충, 세제 개혁을 법제화한 것이다. 법제화 당시 미국 내에서 가장 큰 이슈인 인플레이션을 법명으로 하다 보니 이 법의 내용 속에 미국 공공의료보험기관(CMS)이 제약회사들과의 협상을 통해 처방 의약품 약가를 인하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으리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이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이다. 국가가 국민을 건강보험에 강제적으로 가입하게 하고 국민들이 갹출한 보험료를 재원으로 국민들에게 보험급여를 제공하는 방식인 국민개보험(國民皆保險)을 채택한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의료보험 시장이 사보험과 공보험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가운데 공공의료보험은 다시 65세 이상 고령자, 말기 신부전 환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메디케어(Medicare)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메디케이드(Medicaid)의 두 종류가 있으며, 2023년 3월 현재 약 6500만명이 메디케어에 가입되어 있다. 메디케어 가입자가 지불하는 의료비는 파트 A부터 D까지 네 가지 항목으로 분류된다. 파트 A는 병원 입원비, 파트 B는 병원 외래비와 의사 진료비이고, 파트 C는 민간 기업에 위탁해 파트 A, B 및 추가 보장을 제공받는 데 소요되는 의료비이며, 마지막으로 파트 D는 외래처방 약가와 관련된 비용인데 금번 약가 협상의 대상이 된 10개 의약품이 바로 이 파트 D에 속해있는 것들이다.
정부와 제약회사 간 약가 협상을 위해 신법이 제정 되었어야했다는 설명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미국은 공공의료보험이 시행된 1965년 이래 약가를 낮추기 위해 정부가 직접 제약사와 협상을 벌인 적이 없었다. 이는 우리나라 정부가 지난 2006년 12월 건강보험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수립하고 관련 법제를 정비해 약가 협상제도를 운영하여 온 것과 대조된다.
이번 협상 대상으로 선정된 의약품에는 혈전용해제인 엘리퀴스,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스탈라라, 그리고 당뇨병 치료제 피아스프가 포함되어 있다. 미국 전체 인구의 11.3%에 해당하는 3700만명이 당뇨를 앓고 있는 현실만 보아도 약가 인하가 환자들에게 이익이 될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약값이 내려가 환자들이 이익을 보면 그만큼 제약사들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소송이 뒤따르고 있다.
머크,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 존슨앤존슨, 베링거 인겔하임, 아스텔라스 등 미국 의료시장에서 큰 수익을 내고 있는 글로벌 제약회사들은 이번 약가 협상이 기업들에게 가격 인하를 사실상 강요함으로써 재산권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적법절차 원칙에 반하는 등 미국 연방헌법에 위배된다는 취지의 소송을 지난 6월부터 연이어 제기하고 있다. 약가 협상을 추진 중인 바이든 정부와 정치적 대척점에 있는 공화당의 정치인들과 제약업계는 약가 협상이 혁신을 퇴행시키고 투자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는 약제비 적정화 방안 시행 초기, 이 제도는 정부가 시장 가격을 통제하려 드는 것으로서 제약업계의 연구개발을 방해하며 궁극적으로는 환자의 신약 접근성이 저해될 것이라는 비난이 국내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다.
누가 약값을 정하는 게 옳은가? 이 질문은 각자가 신봉하는 이념을 드러내는 좋은 지표가 된다. 이번 약가 협상의 위헌성 여부는 최종적으로는 미국연방대법원이 판단할 것이다. 매번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추진되는 의료 민영화 시도가 꾸준히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내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준희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