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15년도 더 된 일이다. 서울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던 필자는 급한 연락을 받고 부산을 향했다. 가까운 분에게 뇌졸중이 왔고, 약물치료를 넘어 시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울산 내에서 응급시술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어 부산대병원까지 갔던 것이다. ‘급한데 왜 부산까지? 울산엔 의사가 없나?’ 잘 모르던 필자가 당시 가진 의문이었다. 부산대 의료진분들께서 최선을 다해 주신 덕에 그분은(정확히는 아버님은) 생존하셨지만, 본업이 가능할 정도의 회복은 못 하셨고 몇 년 후 필자가 그 일을 대신 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떨까. 필자가 일하는 울산병원에는 머리와 관련된 전문의가 5인이 있으며 그중 대학병원 교수 출신의 의료진 2인이 15년 전 울산에서 하기 힘들었던 그 치료를 응급으로 계속 하고 있다. 그뿐일까. 심장혈관을 다루는 전문의가 5인 있으며 막힌 혈관을 뚫는 시술 케이스 숫자는 지역에서 현재 가장 많다. 머리와 심장이 아닌 다른 혈관들과 관련된 중재시술 역시 대학병원 교수이자 중재시술 센터장 출신의 영상전문의가 시술을 하고 있다.
지금 아버님에게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다른 지역이나 병원 갈 필요없이 이 병원에서 바로 치료를 했을 것이고 아마 필자의 진로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신기하기도 하다. 울산병원이 거대한 대학병원들에 비교했을 때 심뇌혈관 특정분야에 관련된 역량은 어느 순간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환경이 만들어진 과정들을 지켜봐오면서 15년전 가졌던 의문은 자연스레 풀렸다. 당시 지역내에 의사는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때 지역내 병원들이 적합한 조치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진 않았던 것이다. 역량있는 전문의를 병원에서 영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병원을 그런 전문의가 역량을 펼치기 적합한 장소로 만드는 것 역시 만만치 않다. 15년전 일과 연관해 예를 들자면, 일단 중재시술이 가능한 기기와 장비가 있어야 하고 그를 보조할 수 있는 실력있는 어시스턴트들이 팀으로 움직여야 전문의들이 역량을 낼 수 있다. 시술로 충분하지 않을 경우 여차하면 두개골을 절개하고 수술을 해야 하므로 수술실에선 네비게이터, 마이크로스콥 등 뇌수술 관련 장비도 필요하다. 또 수술이 끝나고 나면 그 환자를 회복시키며 케어할 수 있는 중환자실 및 중환자 스텝들도 있어야 한다. 환자의 상태가 안정될 경우, 초기재활이 중요하기에 재활의학과 전문의의 진료가 필요하며 숙련된 치료사와 함께 재활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애초에 증상을 가진 환자가 응급으로 병원에 방문했을 때 그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초기대응을 할 수 있는 응급의학과 의료진들과 그 판단을 도울 수 있는 CT, MRI 등의 장비 역시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이 적재적소에 있어야 의료진들이 본인의 일들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이를 갖추는데 시간이 걸린다는걸 이젠 경험으로 알고 있다.
며칠 전 응급의료 법률 개정안 뉴스가 나왔었다. 소위 말하는 ‘응급실 뺑뺑이’를 방지하기 위해 수용 거부 사유를 딱 4가지로 정해서 법제화한다는 것이었는데, 해당분야 의사가 없거나 중환자실 병상이 부족하다는 것 역시 수용 거부 사유가 될 수 없으며 이 근거로 거부할 경우 책임을 지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현실과 안 맞아 가짜뉴스가 아닐까 생각했고 이후 과장된 뉴스라는 말과 함께 복지부에서 정정보도가 나왔는데, 아직 개정안이 확정되진 않았고 협의중이라 한다. 과장이든 아니든 필자는 이런 보도들이 나오게 된 배경이 안타깝다. 병원이란 곳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안 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듯 하다.
돌이켜보면 15년전 어쩔 수 없이 부산까지 가야했던 상황에서 필자가 했던 생각에도 그런 인식기반이 있진 않았을까 반성해본다. 실상은 오히려 해주고 싶어도 못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 의사 일인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제대로 된 치료를 위해선 시간을 들여 갖춰야 할 것들이 많은 곳이 병원이기 때문이다. 인식을 바꾸기 위해 필자를 포함한 병원 종사자들이 많은 노력을 해야함을 깊이 느끼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부디 신뢰에 기반한, 현실성이 충분히 고려된 개정안이 나오길 바란다.
임성현 울산병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