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28일, EU 집행위원회, 유럽의회 그리고 유럽연합이사회는 회원국들에 법적 구속력을 갖는 대체연료 기반시설 규정(Alternative Fuel Infrastructure Regulation, AFIR) 제정에 합의했다. 7월13일 고시되어 현재 발효 중인 이 규정은 EU 내에서 운행되는 차량이 전기, 수소 또는 천연가스를 사용해 운행되는 데 필요한 고속충전소를 유럽횡단 운송 네트워크(TEN-T)의 노선에 일정 간격마다 설치하도록 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수송용, 상업용 차량이 이용하는 핵심 노선의 경우 2025년까지, 전체 노선의 경우 2030년까지 60㎞마다 충전소를 설치해야 하며, 트럭과 버스가 이용하는 전 노선에는 120㎞마다 충전소를 설치하는 일을 2025년까지 15%, 2027년까지 50%, 그리고 2030년까지 100% 완료해야 한다.
이 규정은 EU가 2050년까지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핵심 인프라를 EU 역내에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EU 집행위원회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55% 수준까지 줄이는 것을 목표로 2021년 7월14일 발표한 12개의 입법안 패키지(Fit for 55)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입법안 패키지는 2019년 12월 출범한 현 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정책인 유럽 그린 딜(European Green Deal)을 집행하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 마련된 것인데, 추진 경과를 살펴보면 EU가 탄소중립이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난 5년간 관련 계획과 세부 전략 및 법 제정을 일관되게 진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규정은 그보다 훨씬 전인 2014년에 EU가 제정했던 지침(Alternative Fuel Infrastructure Directive, AFID)을 개선해 구체화한 것이다.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EU가 기울인 정부 차원의 노력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선제적이고 적극적이며 구체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범지구적 논의가 처음으로 공식화되었던 UN 기후변화협약이 1994년 발효되고,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정한 교토 의정서가 1997년 채택되어 2005년 발효되었으나 주요 국가들의 불참 및 적용 제외로 실효성이 낮았던 2007년 당시, EU는 유럽을 에너지 고효율 및 저탄소 경제를 주도하는 연합으로 만들겠다는 정책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 감축하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20%로 확대하며 에너지 효율을 20%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2020 기후·에너지 패키지라는 통합 입법을 시행했다. 이 입법 패키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EU가 온실가스 배출 감축 대상을 에너지, 산업, 건축, 수송의 4개 분야로 나누고 분야별 개선 목표를 구체적으로 수치화해 제시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지속 가능한 수송과 관련해 2025년까지 탄소배출 제로 및 저배출 차량을 1300만대 운행하고, 이를 위한 공공 충전시설을 100만 곳에 설치하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올해 발효된 EU의 AFIR는 어느 정책입안자가 한순간 갑자기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지난 17년간의 입법 연혁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단단한 규범인 것이다.
2020년 10월이 되어서야 정부 차원에서의 탄소중립이 천명되고, 2021년 7월 구체화된 추진 계획이 수립된 우리로서는 정책 목표가 수립되고 현재까지 일관되게 추진되어 온 점, 시행 과정에서 시장 및 참여자들과 소통하며 제도를 꾸준히 개선하여 온 점 모두 많이 부러운 대목이다. 산업과 사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에 참여자들 간의 이해관계를 끊임없이 조절하며 관련 정책을 중단 없이 집행해 나가는 것이 유의미한 정책 성과를 거두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에너지 공급망의 전환과 기후변화 대응의 특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변화하는 세계가 만들어 낼 도전과 기회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관련 정책의 수명이 중앙과 지방 정부의 장의 임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십 년 뒤 그리고 이십 년 뒤 미래 세대가 살아갈 다른 세상을 만들어 주기란 어려울 것이다. 2030년, 새로이 구축될 에너지 공급망이 가져올 유럽의 변화를, 그저 해외에서 벌어지는 경제적 현상으로만 해석해 국내 기업이 진출할 관련 시장으로 관점을 한정해 바라보거나 다른 나라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라고 냉소하며 체념하지 않고,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일상으로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준희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