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뒤 사회 모습을 담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최근에 보았는데, 대입 및 취업을 위한 인성 학원이 등장한다는 설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카페에서 실수로 음료를 다른 사람의 옷에 쏟았을 때 뭐라고 해야 하는지를 강사가 물으면, 수강생은 ‘저기요, 이것 좀 치워주세요’ ‘옷 얼마예요? 00페이 되지요?’ 등으로 답한다. 강사가 ‘죄송합니다’라는 정답을 알려주자, 수강생들이 ‘아~’라고 반응하는 이 영상의 댓글에는 10년 뒤가 아니라 2023년 현재 필요한 학원이라는 내용의 글이 많이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 윤리, 도덕, 문학 등을 통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을 배우고, 갈등 상황이 발생하면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익힌다. 그러나 일상에서 교사와 학생,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 갈등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는, 사소한 갈등조차도 도덕적으로 해결하는 사례가 감소하는 것을 체감한다.
또한 ‘반성과 자숙’이 사라지는 분위기도 걱정스럽다. 반성과 자숙은 누군가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조심하고 변화하려는 자발적 태도여야 한다. 진심으로 반성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하고, 자연스럽게 언행을 조심하는 자숙의 태도로 나타난다. 그러나 위기 모면의 반성을 하는 사람은 표면적으로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만, 이후 언행에서 자숙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반성은 위기 상황을 회피하는 도구인 것이다.
위기 모면형 반성을 하는 학생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생활지도를 해야 할지 고민된다. 며칠 전 동료 교사에게 초임 교사 시절에는 학생의 문제성 태도를 지체하지 않고 지도했지만, 교육 경력이 늘어날수록 지도를 지체하다가 흐지부지 넘어가는 경우가 생긴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동료 교사는 나의 고민에 ‘자극-반응의 속도’라는 신선한 관점으로 조언을 해 주었다. 신규 시절에는 문제성 태도라는 자극을 받으면 즉각적인 지도로 반응했지만, 교육 경력이 늘어날수록 자극을 받은 후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느라 반응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극에 대한 반응이 지체되는 이유에는 사려깊은 부분뿐만 아니라 교사로서의 무력감도 상당히 차지하고 있기에 여전히 씁쓸한 감정은 남아 있었다.
<역사의 쓸모>(최태성)에 언급된 ‘품위 있는 삶을 만드는 선택의 힘’이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씁쓸한 마음을 지워본다. 저자는 ‘품위 있는 삶은 역사 속에서 나의 선택이 어떻게 해석될지 가늠해 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 판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품위 있는 교사를 만드는 선택도 마찬가지이다. 교권이 무너지는 사회적 분위기 탓에 무력감에 빠져 있기보다는 교육의 본질에서 나의 선택이 어떻게 해석될지 고민하고 학생에게 미칠 영향력을 가늠해야 할 것이다. 공무원 법에 기재된 품위 유지의 의무에서의 ‘품위’ 개념을 넘어선 ‘진정한 품위’가 있는 자유롭고 떳떳한 교사의 모습을 꿈꿔본다.
이혜경 울산 천상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