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한다
문고리가 있는 창호지에 햇빛이 오자 단풍잎들이 꽃잎처럼 불타면서 탱자 울타리 아래 맹꽁이 소리가 콘트라베이스처럼 흘러나오던 순간의 기쁨
갑천변에는 억새 숲이 자랐는데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발소리에 청둥오리가 물소리가 깊은 어둠 속으로 도망가는 순간의 기쁨
밤하늘 눈썹에는 눈물 같은 별들이 떴는데 갑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구름 사이 창백한 얼굴을 내비친 하얀 달빛의 허리를 안고 갔던 순간의 기쁨

시각·청각·촉각 등 온몸이 반응하는 기쁨의 순간
기쁨을 느꼈던 세 가지 순간을 묘사한 이 시에는 색채와 소리가 가득하다. 창호에 비치는 햇빛, 타오르는 단풍, 천변의 억새 숲, 밤하늘의 별과 구름, 하얀 달빛, 그리고 맹꽁이 소리, 발소리, 청둥오리 소리. 순수한 기쁨은 자연에서 오는 것인가.
맹꽁이를 콘트라베이스에 빗댄 점이 재미있다. 소리와 모양새에서 둘은 정말 닮았다. 발소리에 놀라 부산스레 도망가는 청둥오리는 어떤가. 시인은 생명이 약동하는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삶의 기쁨을 느낀다. 두 가지가 소리를 매개로 한 기쁨인 반면 세 번째 경우엔 소리는 등장하진 않지만, ‘달빛의 허리를 안고 갔다’는 표현에서 무릎을 치게 된다. 이런 풍경에 어울리는 소리라면 시인의 다른 시 ‘월하탄금도’에 나오는 거문고 소리가 아닐까. 그것도 마음으로 듣는다는, 무현금(無絃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세 가지 기쁨이라 하니, 비너스 앞에서 춤을 추는 세 명의 미의 여신이 등장하는 보티첼리의 ‘봄’이란 그림도 떠오른다.
물론 이 시는 봄이 아니라 가을을 배경으로 하여 소쇄한 기운이 느껴지지만, 아름다움에 계절을 따져 무엇하리. 시각, 청각에 더하여 촉각까지, 솜털이 돋듯 온몸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쁨의 순간. 때때로 꺼내 보는 찬란했던 한때.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