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도서 폐기와 ‘종갓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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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도서 폐기와 ‘종갓집도서관’
  • 경상일보
  • 승인 2023.12.1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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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운 전 언론인

최근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내년 6월 중구도서관이 ‘종갓집도서관’이라는 새 이름으로 개관하게 되는데 이 때 책을 전시·보관할 공간이 부족해 지금까지 울산도서관에서 관리해 온 도서를 포함해 중부도서관 소유 30만 여권의 책이 대부분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고 했다.

울산도서관에 있는 책은 중부도서관이 새 도서관을 지으면서 임시로 보관했던 책이다.

공간이 부족해 책을 폐기해야 한다는 결정은 중부도서관이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결정은 책의 지적 가치를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적서승금(積書勝金)’이라 해 ‘책을 쌓는 것이 금을 쌓는 것 보다 낫다’는 정신으로 살아왔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책은 말 없는 스승이다’고도 하고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도 한다.

울산은 1960년대 공업도시가 되면서 도심에 있던 책방이 많이 사라졌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울산에는 중앙동 중심으로 문화서림, 동아서림 등 큰 책방이 많았다. 남구 신정동에도 세종서림 그리고 공업탑 중심으로 처용서림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서점은 처용 한 곳 뿐이다. 이러다 보니 요즘은 울산 시민이 책방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을 도서관에서 읽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다. 도서관은 책이 있기 때문에 서점과 함께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그런데 도서관이 공간 부족으로 책을 폐기한다는 것은 정신 건강과 휴식 기능을 스스로 저버리는 행위다.

폐기를 앞둔 책 중에는 향토지와 지역 문인 작품도 많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도서관이 돈을 들여 구입했고 일부는 저자가 시민을 위해 기부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확보한 책을 공간 부족으로 폐기한다는 것은 책 구입에 필요한 돈을 세금으로 낸 시민과 또 어려운 여건에 책을 저술해 도서관에 기증한 작가를 배신하는 행위다. 1960년대 중반 울산문화원이 개원했을 때 문화원 건물에 도서관을 두었는데 이 곳에 수장할 책을 구하기 위해 당시 박영출 원장이 얼마나 고생했나 하는 얘기는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다. 박 원장은 당시로는 먼 거리인 서울까지 가 아들이 정음사를 운영했던 최현배 선생을 만나고 책을 얻고 또 울산 출신으로 당시 중앙 실세였던 이후락 비서실장을 방문해 책 구입에 필요한 돈을 얻어 그 돈으로 책을 사 도서관에 비치했다.

책은 공간이 부족하다고 폐기할 수 있는 일반 상품과는 다르다. 책은 일반 상품이 갖지 못하는 높고 깊은 지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아파트를 지을 공간이 있고 시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상품을 쌓아 놓을 건물은 많은데 책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 책을 버릴 수밖에 없다면 이것은 현대판 ‘분서갱유’로 우리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한다. 중부도서관은 최근 대학도서관들이 전산화 작업을 통해 책의 내용을 담아놓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책은 폐기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한다. 그러나 책은 단순히 지식을 담는 도구가 아니고, 책 속에는 전산화 작업에서 맡을 수 없는 향기가 있다. 서점이 수익 창출을 위해 만들어진 문화공간이라면 도서관은 독자와 호흡을 나누고 때로는 작가와 대화할 수 있는 문화 공간 역할을 한다.

홍영진 울산 중구의원은 시민의 소리를 통해 많은 책이 이처럼 폐기할 수밖에 없다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필요한 책을 구입할 수 있도록 폐기 전 도서목록이라도 만들어 공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차제에 이런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근본 대책도 필요하다고 본다. 전국의 많은 지자체가 폐교를 수장고로 만들어 귀중한 책이 폐기 되는 것을 막고 있다. 최근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울산에도 적지 않은 폐교가 생겨나고 있다. 이들 폐교를 수장고로 이용하는 것이다. 울산 역시 타 도시처럼 많은 책을 소장한 시민들이 적지 않다. 이들 중 책 처리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도서관에 기증하고 싶어도 일반 도서관은 중부도서관처럼 전시와 보관할 공간이 없다면서 거절한다. 걱정을 하다가 결국 폐지 값으로 헌책방이나 고물상에 넘긴다.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문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책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문화인이 될 수 없듯이 책을 전시·보관하지 못하는 도서관이 훌륭한 도서관이 될 수 없다. 새 건물에서 새 업무를 시작하는 종갓집도서관이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장성운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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