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다사다난했던 2023년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의 해가 가고 며칠 후면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가 시작된다.
순탄치 못했던 지난 코로나 시절 3년은 우리에게 엄청난 시련을 주었지만 동시에 큰 성찰의 시간이었다. 그 세월은 스쳐 지나가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절차탁마하고 심기일전함으로써 곧 다가올 새 시대를 위해 준비하기에 충분한 기회였다.
‘인생은 여행’이라는 말이 있다.
여행길에서 숱한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며 데면데면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헤어지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다.
지구상에는 칠레의 수도를 비롯해 10여 군데의 ‘산티아고’라는 도시가 있다. 그중에서 이베리아반도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기점으로 하는 순례길은 9개의 코스가 알려져 있고 그중 북쪽길(Camino del Norte), 포르투갈길, 프랑스길 등 세 코스가 가장 인기 있다고 한다.
요즘 종교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대단한 각오로 한 달가량의 일정을 잡고 순례길에 오르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필자가 수년 전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를 여행할 때 만난 나이 지긋한 여행 가이드는, 순례길에서 여행객들이 헤어질 때 ‘부엔까미노(Buen Camino)!’를 외친다고 했다.
스페인어로 buen은 ‘좋은’, camino는 ‘도정, 길’의 뜻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가 ‘좋은 공기’라는 의미가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부엔까미노’는 ‘당신의 여행길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길을 따라 만난 순례자들이 길에서 헤어지면서 전하는 이 인사말은 축복의 언어요, 여행길이 평안하기를 바라고 주고받는 덕담이다.
인생은 낙타를 타고 신기루를 찾아 황량한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
‘여행도 가슴이 설렐 때 떠나야 하고 다리가 떨릴 때는 어렵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티베트의 순례자들이 오체투지 하며 라싸를 향해 1만2000㎞ 고행의 길을 택하듯이 인생은 미개척지를 여행하는 나그네처럼 늘 나를 새롭게 혁신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도 제주 ‘올레길’ 등 지역별로 수많은 트래킹(trekking) 코스가 있다. 또 히말라야에 차마고도가 있듯이 과거 석탄을 채굴하던 강원도 영월, 정선, 태백, 삼척에 걸쳐 운탄고도(運炭高道) 아홉 길이 개발되어 있다.
늘 미래는 새롭고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생도 하루하루가 설렘과 같은 것.
그러나 새로운 곳을 가기 위해서는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하나의 마무리단계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유비무환의 자세도 요구된다. 쇠로 새로운 연장을 만들기 전에 불에 달구는 과정이 있어야 하듯이, 단단한 쇳덩어리를 망치로 두드린다고 바로 제품이 탄생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 끝은 영원한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예비하는 것이다. 영어로 졸업을 뜻하는 ‘commencement’도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의 끝에는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이다.
인생이 여행길이라고 해서 쉼 없이 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 피곤하거나 지치면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에서 잠시 휴게(休憩)하면서 오던 길을 반추하기도 하고 다시 인생 순례의 길을 나서면 될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올해의 끝자락에 서서 내년을 향한 시작으로 설레는 우리에게 외치고 싶다.“부엔까미노!”
권영해 시인·울산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