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 생각하며(49)]고향의 냄새
상태바
[김상곤의 살며 생각하며(49)]고향의 냄새
  • 경상일보
  • 승인 2024.02.07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상곤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바다는 여름보다 겨울에 더 풍성하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는 맨손으로도 건져낼 수 있는 해조류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겨울 바다 풍경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미역과 같은 해조류가 나오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바위틈에 붙은 맛있는 따개비를 캐는 것도 겨울 바다에서였다. 그래서 바닷가 근처 마을의 겨울 밥상은 작은 고동이나 해초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예사였다. 어린 시절 먹던 겨울 음식은 대부분 이런 맛과 냄새에 대한 기억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도 재래시장에 가면 해산물 파는 가게 근처를 기웃거린다.

소한 대한의 추위가 잦아드는 이맘때가 되면 바닷가 근동의 남자아이들은 대나무 장대를 하나씩 어깨에 메고 바위가 많은 해변으로 갔다. 어떤 종류의 고기를 낚아야겠다는 계획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온종일 갯바위 위에서 견딘 결과라야 노래미 네댓 마리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봄기운이 도는 겨울 바다는 조금도 지겹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바위에 달린 미역귀를 몰래 건져 먹는 재미도 있었다. 음력 정월의 고향 바다는 깊은 해초 향과 더불어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다.

계절마다 어울리는 냄새가 있다. 바닷가의 계절은 미역과 같은 해조류 냄새와 더불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울산은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는 도시다. 그래서 추운 날씨가 풀리면 바다는 깊은 향을 풍기며 우리를 맞이한다. 특히 해안선 굽이굽이마다 자리한 작은 항구들은 잡는 어종도 다르고 풍기는 냄새도 다르다. 겨울 항구는 생선 비린내보다 해조류 향이 강하게 풍긴다.

지금은 바닷가를 찾아가도 카페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겨울 바다를 느끼지만, 음력 정월이 되면 바닷물도 그리 차갑지 않다는 것을 바닷가의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소녀들도 바구니를 끼고 바위틈에서 해조류를 건져 올렸다. 다음 날 아침의 국거리가 되는 해초를 어린 손으로 구하는 것이 별스러운 일이 아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도시 생활에 젖은 지금도 겨울의 막바지가 되면 해초 향에 대한 허기를 느낀다. 전통 시장을 기웃거리면서 몇 가지의 해조류를 사서 돌아오지만, 파도에 일렁이던 미역과 청각, 그리고 모자반의 부드러운 향을 체험하기는 힘들다. 고향 바다의 향기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더 깊은 느낌으로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후각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가장 직관적인 감각이 후각이다. 인간은 자면서도 냄새를 맡는다고 한다. 깊이 잠든 사람의 코 밑에 막 피어난 꽃가지를 갖다 대면 자는 사람의 표정이 바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그만큼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감각이 후각이다. 그래서 형사가 사건을 수사할 때 논리적 추리에 앞서 어떤 낌새를 느끼면 ‘냄새를 맡았다’라고 표현하는 까닭일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의식의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 어디쯤엔가 있다는 심리학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나이 들수록 나를 움직이는 자아의 위치가 잠재의식의 저편으로 조금씩 옮겨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맘때 떠오르는 고향의 냄새도 그런 현상 중의 하나다.

그래서 올해는 잠재의식을 따라가는 여행을 하리라 다짐한다. 과자 냄새로 시작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는 긴 여행이다. 이번에는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 보리라 작심한다. 때로는 책 속의 여행이 현실에서의 여행보다 더 강한 느낌을 주기고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 여행 속에서 고향의 냄새와 같은 긍정적인 기억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좋은 기억을 되새기는 것도 남은 삶을 풍부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노년에 어울리는 경제적인 여행 방법이기도 하다.

김상곤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 곳곳 버려진 차량에 예산·행정 낭비
  • [지역민도 찾지 않는 울산의 역사·문화명소]울산 유일 보물 지정 불상인데…
  • 확 풀린 GB규제…울산 수혜 기대감
  • 궂은 날씨에도 울산 곳곳 꽃놀이 인파
  • [기고]울산의 랜드마크!
  • 이재명 대표에서 달려든 남성, 사복경찰에게 제압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