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19]]3부. 하카다 (6) - 글 : 김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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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붉은 도끼[19]]3부. 하카다 (6) - 글 : 김태환
  • 이형중
  • 승인 2024.06.1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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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근원을 따지면 수천 년 전부터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것은 결코 우연으로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내가 하는 말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갑자기 만난 사람이 수천 년 전에 만났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단 말인가.

에리코는 결혼은 현실이라고 대답했다. 조선에 남아있는 김순조와 어린 아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노라고 아마도 내가 미친 것 같다고 했다. 그냥 미친 남자로 살고 싶다고 했다. 이번 생에서 에리코를 보지 못하고 산다면 일찍 죽어서 다음 생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이 좋았어요. 백련정이란 정자도 아름다웠고요. 당신의 아들도 귀여웠죠. 마츠오와는 사돈을 하자고 약속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당신의 아내는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차렸지요. 그 모든 것들과 등을 져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에리코는 현실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 모든 소소한 아름다운 것들을 포기할 만큼 사랑이 중요한 것인지 묻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일은 인연의 고리에 엮이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삶의 방향도 모두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에리코가 결혼을 승낙하지 않아도 곁에서 머물며 머슴처럼 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에리코의 마지막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그만 말문이 턱 막혀 버리고 말았다.

“당신이 마츠오를 죽였나요?”

나는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시인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것이었다. 에리코는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실까 물었다. 십계명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이 -살인하지 말라-인데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이미 죽은 자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간음이 아니라고 해도 살인의 죄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느냐고 했다.

마음에 음심을 품기만 해도 간음이라고 했는데 나는 분명 간음의 죄를 범하고 있었다. 백련정에서 에리코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간음의 죄를 범한 것이었다. 백련정에서의 만남 이후에도 나는 꾸준히 에리코를 만났다. 그녀가 주일이면 빠지지 않고 언양성당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나도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에리코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와도 같았다.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그녀가 천황폐하의 만수무강이나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도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필시 한쪽이 패배해야 끝나는 것인데 백인으로 오신 주님이 동양인이 승리하는 걸 용납하지 않으실 것 같았다.

나는 매번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매주 에리코를 만나는 것으로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었다. 전쟁의 결말 같은 것은 아무 관심이 없었다.

에리코는 언제부턴가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마츠오가 죽고 나서부터인지 일본으로 건너오고 나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성당에는 나가지 않지만 성경을 잣대로 나를 재어보고 있었다. 제법 넓은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 나눈 대화는 몇 마디에 불과했다. 나는 끝내 예수님은 서로를 사랑하라고 했다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녀가 한 말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낙담하기는커녕 가슴 한구석에 투지 같은 걸 불사르고 있었다.

-당신을 두고 가지는 않겠소-

에리코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운명의 매듭을 만들고 있는 신들에게 던지는 도전장이었다.-

나는 잠시 노트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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