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문화전(文畵展)]죽음을 생각할때 삶은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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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문화전(文畵展)]죽음을 생각할때 삶은 더 깊어진다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5.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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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절한 곳 / 유화 / 세로 36.4 x 가로 72.7cm 권영태 작.

원효가 말하는 화쟁의 직접 대상은 ‘상호 배타적 견해 다툼’이다. 자기 견해의 전면적 승리를 위해 타자 배제적으로 충돌하는 전투적 쟁론을 화해시키려는 것이 원효의 화쟁이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의 모든 불화와 충돌은 예외 없이 견해에 연루되어 있다. 견해는 감정, 욕망, 행동 등 인간의 모든 것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견해와 무관한 행위도 없고, 견해와 분리된 욕망이나 감정도 없다. 인간에게는 본능적 충동마저 견해와 무관하지 않다.

화쟁은 견해의 상호 배타적 충돌을 화해시키려는 것이고, 인간의 모든 인식과 경험 및 행위는 견해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화쟁의 적용 대상은 ‘인간 세상의 모든 배타적 불화와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시선과 경험은 특이한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과 견해 때문이다. ‘삶에 대한 견해’와 ‘죽음에 대한 견해’가 상호 배타적으로 충돌하며, 그로 인해 인간은 특유의 고통을 겪는다. 삶과 죽음의 대립과 충돌은 전형적인 쟁론이며, 따라서 화쟁의 대상이다.

삶은 언젠가 반드시 소멸한다. 예외는 없다. 그런 점에서 삶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특징이다. 인간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다. 살아있는 생명을 존중하고 함부로 해치지 않으려는 것이 윤리의 보편 원칙이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아무리 귀하게 대접받는 생명이라도 그치는 날이 온다. 인간도 죽고 동물도 죽는다. 그런데 삶과 죽음에 대한 대응과 경험은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 인간 특유의 언어능력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능력은 기억 능력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는 경험을 본능적 수준에서 기억한다. 주로 생존 이익과 직결된 경험을 본능적 기억에 새겨두었다가 필요할 때 본능적으로 소환해 행동에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인간의 기억은 특별하다. 언어에 의해 발생한 것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차이를 기호에 담아 분류하여 처리하는 언어능력으로 인해 기억 내용은 선명하게 구분된 차이들이 되었고, 그것은 기억의 장기화를 가능케 하였다. 또 구분된 차이들의 비교를 통해 인간의 경험은 판단·평가·이해·이론 등 개념적인 것이 되었다.

그로 인해 인간의 기억 내용은 본능적 경험을 넘어 인식적 경험이 되었다. 인간은 이 인식적·언어적 경험을 장기적으로 기억하고 필요할 때 선별적으로 소환해 낸다. 또 현재와 미래의 구성은 언제나 이 특별한 기억 능력에 기대고 있다. 게다가 모든 기억은 언어에 담겨 객관적으로 전승된다. 다른 생명체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현상이다.

기억의 장기화, 소환된 기억의 정밀성은, 문제 풀이 능력을 극적으로 발달시켰다. 생물학적 진화에 필요한 정도의 본능적 집단기억으로는 이루기 불가능한 수준의 문제 해결력을 가능케 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불과 5천 년 안에 이루어진 일이다. 약 47억년 전에 생성된 지구, 대략 600~800만년 전에 등장한 인류의 조상 유인원, 대략 4만~6만년 전에 출현한 현생 인류의 조상, 약 5000~6000년 전에야 일반화된 단순한 문자인 그림문자. 이렇게 보면 현재 인간이 구사하는 언어·문자 능력의 연륜은 지구와 인간의 나이에 비교할 때 매우 짧다. 단기간에 역동적으로 고도화한 특수한 현상이다. 유사한 특징·차이를 언어에 담아 개념으로 처리하는 언어인간의 등장은, 그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지구와 생명의 역사에 극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언어에 수반하여 발달한 특별한 기억 능력과 예상 능력은 그 변화의 한 주역이다.

아울러 언어능력은 삶과 죽음을 생물학적 경험으로부터 개념적 경험으로 바꾸어 버렸다. 언어가 개입하면서부터 삶과 죽음의 불화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인간의 특별한 언어능력은 고도의 문제 해결력을 선물했지만, 인간은 바로 그 특별한 능력으로 인해 특별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과 ‘죽음의 예상’으로 인해 겪는 고통이다. 삶을 구성하는 몸과 행위, 생각, 가족과 지인들은 ‘나의 삶’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데 ‘나의 삶을 떠받치던 나의 몸과 타인들’은 변하고 마침내 사라진다. 사는 동안 겪어야 하는 ‘사별 고통’이다. 게다가 이 사별 고통은 기억된다. 그것도 거의 평생에 걸쳐.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망각은 아니다. 그저 무게만 덜해질 뿐이다.

게다가 인간은 타인의 죽음을 보고 기억하면서 자기의 죽음을 예상한다. 동물 역시 살면서 타자의 죽음을 수 없이 보지만, 미래의 자기 죽음을 미리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사별 고통도 기억에 담아두고 두고두고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다르다. 각별했던 인연들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두고두고 괴로워한다. 또 자기도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예견한다. 아직 살아 있으면서도 미리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당겨 현재의 삶에서 고통을 겪는다.

사별 기억은, 아직 사별하지 않은 인연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잘 가꾸어 가려는 각성의 계기도 된다. 죽음 예견은, 삶을 가치 있고 보람차게 만들려는 의지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경우 사별 기억과 죽음 예견은 고통스럽기만 한 실존의 질병이 아니라 삶의 고귀하게 만드는 쓴 약이다.

그러나 사별 기억과 죽음 예견을 이렇게 소화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언어능력에 수반하는 ‘동일성 관념’ 때문이다. 인간은 ‘나’ ‘나의 것들’의 영구 지속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 언어로 인해 발생한 환각적 기대다. 언어에 담은 내용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 필요에서 생겨난 허구 관념이다. 허구이기에 그 기대는 충족될 수가 없다. 기대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절망과 허무의 심연’에 깊이 빠져든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상호 적대적인 쟁투 관계다. ‘불사(不死)의 영생’으로 죽음에 대한 삶의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한다면 환몽이다. 생물학적 영생으로 죽음을 이긴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삶과 죽음이 서로 밀어내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는 화해는 가능할까? 원효의 화쟁은 삶과 죽음마저 화해시킨다.

글=박태원 인제대 석좌교수(화쟁인문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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