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밀선을 옆에 두고 산도로 접어들었다. 살티공소를 언 듯 지나치면 좌측은 배내재를 넘는 길이고 우측은 곧장 밀양 쪽으로 빠지는 길이다. 지금이야 잘 닦여 차들이 쌩쌩 다니지만, 옛날엔 소금과 솜, 숯, 하다못해 짐승 눈을 피해 캔 나물, 약초 등을 이고 지고, 이 장 저 장 팔러 다니는 게 운명이 돼버린 사람들의 길이었다. 결코, 놓아서는 안 될 삶의 끈 같은 길이었다.
호박소를 통해 백운산을 오르려는 이 길엔 십여 년 전 우여곡절 끝에 완공해서 천황산까지 왕복으로 다닐 수 있도록 케이블카 탑승장을 놓았다. 사람과 마을에 이득이 된다는 계산 하에 놓았겠지만, 하늘 아래 각진 것 없이 부드러운 유선의 산 흐름을 딱! 하고 끊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게 한다. 하여간 볼썽사납다.
호박소를 거쳐 백운산에 오른다. 호박소는 억겁 세월이 만들어낸 돌개구멍이다. 윗물에 떠밀려온 모래와 자갈들이 바위 구멍에 둥지를 틀었다가 홍수와 같은 큰물에 갈 곳 없어 그만 주저앉아 만들어진 게 호박소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이 호박소에 담겼으니 그 세월이 만들어낸 인간사 또한 들어있을 터, 밀양에서 가장 유명한 전설을 들라치면 단연 ‘아랑 전설’이지만 여기 호박소도 그에 못지않다.
가뭄을 들게 했다는 독룡 ‘강철이’와 가뭄이 들면 비를 내렸다는 ‘이목’의 두 전설이 이 호박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삼국유사 ‘보양(寶壤) 이목(梨木)’ 편에서 “어느 해 갑자기 가뭄으로 밭의 채소가 타게 되자 보양이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천제는 자기 몰래 비를 내리게 한 이목을 사자를 시켜 죽이려 하였다. 보양이 꾀를 내어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이목(梨木)이라 가리키자 사자는 그 나무에 벼락을 내리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벼락을 맞은 배나무는 부러졌는데 용이 어루만져주자 즉시 소생하였다” 여기서 이목은 한자 그대로 용이 못된 이무기를 차차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호박소 ‘이목’과 삼국유사 ‘이목’은 닮기도 많이 닮았다.
호박소는 절구와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옛날엔 절구를 땅에 찧어 독충 해충을 찧는 풍습이 있었고 동서남북 땅을 찧어 들어간 모양으로 그해 가뭄과 홍수를 점쳤다는 것으로 볼 때 사시사철 물이 끊기지 않는 이곳 산내는 복 받은 곳임이 틀림없다. 물이 저리 흔천만천 넘쳐나니 말이다.
처음 으레 낮은 구릉이나 평지를 걷던 방식의 산행은 보기 좋게 예상을 비껴갔다. 그렇게 썩 된비알 졌다고는 할 순 없으나 처음부터 맞닥트린 엄장 큰 바위는 숨 고를 겨를을 주지 않는다. 곳곳에 집채만 한 바위너설을 거쳐 올랐다 싶으면 앉아 쉴만한 평석, 그곳에서 언뜻 바라본 천황산과 그 품에 안긴 마을 전경은 탄성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산괴가 무너질 듯 움푹 팬 천황산에 걸터앉은 구름과 그 아래 미동 없이 잠뽀록이 가라앉아 밥꼬슬 냄새를 풍길 것 같은 마을은 한 폭의 그림이다.

하물며 이럴진대 천황산 얼음골에서 가파른 산길 한 마장을 오르면 스승 유의태를 해부하였다고 하는 허준의 동의굴에서 바라보는 백운산 산세는 천하가경이라니 자못 그 경치가 궁금하다. 그곳에서 백운산을 바라본 허준의 눈엔 앉고 걸어가는 세 마리 백호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백운산을 머리맡에 둔 동의각은 허준과 유의태 선생을 기리는 곳으로 일찌감치 의술의 산실이 밀양이었음을 밝혀둔다.
백운산은 255㎞라고 하는 거대한 영남알프스 산군 중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운문산을 북서로 해서 가지산 남쪽 아래로 천황산을 두었다. 1000m가 넘는 산이 수두룩하다고 해서 높낮이로만 따져 백운산(885m)을 낮다고 나지리 보면 안 된다. 그 산이 가진 우락부락한 남성미의 산태(山態)는 그 어느 산과 견줘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저 남도의 월출산과 중원 월악산을 갖다 댈 것이며, 금원산과 금수산의 암릉미가 이에 비할 건가. 가까이 가지산이 이 산군 중 가장 높다고 뻐긴들 백운산의 딱 바라진 어깨와 흉근에는 미치지 못한다. 산양(山樣) 또한 영남알프스의 설부화용이 따로 없다. 흰 도포를 입은 선풍도골(仙風道骨, 신선의 풍채와 도인의 골격)의 면모로 보건대 영남알프스 산군 중 단연 으뜸이다.
풍수와 도참비기로 유명한 신라말 도선국사는 이 땅에 3600개의 명당이 있다고 하였다. 그중 함양 백운산을 최고의 명당지기로 꼽았지만, 이곳도 그에 못지않다. 분노로 치달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만한 아름다운 풍광이 있으면 그게 명당이 아니고 무엇이랴. 성마른 사람들은 물굽이치고 도는 곳에서 살아야 조곤조곤해질 것이고 기가 부족하여 체머리 앓는 사람은 바위 위에서 오래도록 있어야 기가 보충된다고 하니 이곳이 그곳이 아닌가 싶다. 그걸 셈하려 들 때 여기 백운산을 따를만한 곳은 없다.
그걸 내도록 감상할 새 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오르면 뽀얀 살결답지 않게 천인단애로 내리꽂은 거대한 바위는 왜 이 산을 영남알프스에서 숨겨둔 비경이라 하였는지 알만하다. 그곳에 바위를 비집고 살아남은 키 작은 와송과 보득솔은 마치 백운산을 벗어나 승천을 꿈꾸고자 몸부림치는 이무기와 닮았다. 경북 울진의 금강송이 일찍이 춘양목이란 이름으로 귀하고 비싼 소나무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곳 소나무가 한겨울 산꼬대에 자기 옆 가지를 스스로 떨어뜨리며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은 것과 같이 이곳 소나무도 자기 뿌리를 겨우 한 줌 흙으로 흘려보내고 바위를 뚫고 자라려니 굴왕이 아니고선 달리 살 방법이 없어 몸을 비틀어가며 컸을 것이다.
벼랑길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안돌아 철계단을 거쳐 백운산 등성이에 올라탔다. 올라선 게 아니라 올라탔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정도로 근육질의 산은 남성미가 물씬 난다. 그렇게 산어귀에 든 지 1시간 반 만에 산정에 올랐다. 은빛 철 기둥을 의지 삼아 백운산의 하얀 구름 너머를 바라보노라면 저 멀리 구름을 머리 위에 두고 우뚝 솟은 가지산과 운문산이 보인다. 맘 같아선 허든거리는 다리라도 부러져라. 채찍질하고 내쳐 걷고 싶지만 백운산의 아름다움을 눈 시리게 간직했으니 하산하는 게 마땅하다.
하산길은 급격하게 경사진 길은 아니지만, 곳곳에 로프를 걸어놓은 바위라서 올라올 때 가졌던 마음 그대로 내려갈 때도 똑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방금 절에든 동자승 머리처럼 반들반들한 바위를 거침없이 내리꽂는 구룡소의 폭포수는 가슴 속을 시원하게 해준다. 옥계수 맑은 물에 얼굴을 파묻으니 세상사에 찌든 때가 말끔히 가시는 것 같다. 글·사진=백승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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