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리버풀과 티사이드는 여러모로 닮았다. 리버풀은 조선·항만 쇠퇴, 티사이드는 철강·중공업 쇠락이라는 위기를 겪었다. 두 도시는 전통 산업이 무너진 뒤 청정에너지 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았다. 해상풍력, 탈탄소 프로젝트 등을 앞세워 지역 경제 활성화는 물론 신규 일자리 창출까지 노린다. 영국 해상풍력 확대 정책의 전초기지인 이들 도시는 “바람이 곧 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산업 전환의 도전에 직면한 울산에게 두 도시의 경험은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을까.
◇세계 최대 해상풍력 리버풀
“The wind is money.”(바람은 돈이다.)
지난 6월26일(현지시간) 영국 리버풀 해안을 스쳐가는 초속 7~8m의 거센 바람을 두고 마크 놀스 리버풀 광역지방자치단체 저탄소정책국장이 던진 말이다. 바람을 붙잡아 전기로 바꾸면 곧 돈이 된다는 것.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해상풍력의 본질을 압축한 한마디였다.
조선·항만업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리버풀은 20세기 후반 산업 쇠퇴와 함께 도시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됐다. 하지만 바닷바람을 자산으로 바꾸는 해상풍력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면서 청정에너지 전환 도시의 아이콘으로 재도약했다.
리버풀은 세계 최초로 초대형 해상풍력 터빈을 실증하며 재생에너지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리버풀 해안에서 약 7㎞ 떨어진 버보뱅크(Burbo Bank) 해상풍력단지는 2007년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인 3.6㎿의 해상풍력 터빈을 처음 상업 운용했고, 2017년에는 세계 최초로 지멘스 8㎿급 초대형 터빈을 운용했다.
총 320개의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버보뱅크의 전체 발전용량은 약 348㎿로, 영국 내 약 30만 가구에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이다. 바이킹(부유식 해상풍력), 아웰모어, 모건, 모나 등 대형 프로젝트들이 인근에서 진행 중인데, 이를 보면 영국 해상풍력은 이미 단순히 한 도시의 전력 수요를 충당하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평가다.
리버풀 사례는 울산 해상풍력 추진 과정에 시사점을 던진다. 리버풀 역시 개발 초기에 ‘우리의 일몰을 지켜달라’는 SOS(Save Our Sunset) 캠페인 등 일부 반발이 있었지만, 단지가 실제로 조성된 후에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현재는 비틀즈, 축구팀에 이어 리버풀 3대 관광자원으로 꼽힌다. 이는 울산이 부유식 해상풍력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역수용성을 확보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특히 리버풀은 미국과 유럽을 잇는 유일한 해저 광케이블이 지나는 입지적 강점을 바탕으로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데이터센터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기업에 적극 어필하고 있다. 울산 역시 SK·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이 관심을 보이는 AI데이터센터 산업과 해상풍력을 연계할 경우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놀스 국장은 “리버풀은 영국 풍량의 80%를 차지하는 서풍을 가장 먼저 맞는 곳으로, 풍력 잠재력은 압도적으로 크다”며 “중공업·화학 중심의 에너지다소비 산업단지가 있어 잉여 전력을 소화할 수 있고, 그린수소 생산 같은 연계사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데이비드 파월 리버풀시 교통국장은 “추후 모든 단지가 가동되면 발전량은 3.9GW까지 늘어날 것이다. 리버풀은 영국 목표보다 더 앞당겨 2035년까지 넷제로를 달성할 것”이라며 “탈탄소 에너지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 2000여개 이상 일자리를 만들고, 온실가스 4분의1 감소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산업도시 재생의 새 모델 티스밸리
영국 북동부에 위치한 티스밸리는 제철·중공업의 도시였다. 2015년 대규모 제철소가 폐쇄되고 중공업 기반이 무너지면서 지역 경제는 끝없는 침체에 빠졌다. 2000개 이상의 직접 일자리가 없어지는 등 실직자가 대량 발생하고 인구 유출이 이어지며 쇠락한 산업도시라는 오명을 얻었다. 티스밸리를 다시 일으킨 것은 해상풍력이었다. 얕고 완만한 해저 지형 덕분에 대규모 단지 건설이 용이하고, 글로벌 에너지 기업과 다국적 투자자들이 앞다퉈 진입하며 지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지난 6월25일(현지시간) 세아윈드(SeAH Wind)가 약 1조6000억원을 투입해 티스밸리에 조성 중인 세계 최대 규모 해상풍력 하부 구조물(모노파일) 공장 현장. 세아윈드는 한국 기업 세아제강의 해상풍력 모노파일 제조 영국 법인이다. 축구장 30개 규모의 세아윈드 현장은 다국적 협력이 해상풍력 성장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사례다.
브라이언 아처 레드카앤클리블랜드 자치구 책임자는 “해외 기업이 들어올 때는 단순 투자만이 아니라, 법률 이해를 돕고 생활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까지 한다. 한국 기업에는 한식당과 문화적 지원을 보장해주고 있다”며 “이를 통해 세아윈드만 해도 1750여개의 직접 고용 효과가 예상되고, 티스밸리 전역에서는 약 4만600여개의 일자리가 창출된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알렉 브라운 레드카앤클리블랜드 의장은 “세아윈드 등 해외기업이 들어와 수익과 세수가 지역으로 환원되면서 분위기는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며 “세아의 경우만 해도 연간 500만 파운드의 세수가 늘었고, 이는 단순히 넷제로 목표 달성에 그치지 않고 지역 사회 운영에도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이는 조선·자동차·석유화학 중심의 숙련 인력이 많은 울산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기존 노동력의 재배치·청년층 맞춤형 교육과 해외기업 투자에 대한 수용성 등을 종합적으로 풀어낼 때, 울산 역시 산업 전환의 도전을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티스밸리의 산업 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노동자 재교육이었다. 철강이 지고 해상풍력이 뜨는 과정에서 기존 숙련 노동자뿐 아니라 청년 세대까지 아우르는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됐다. 레드카 지역 대학에서 해상풍력 터빈 고공작업 기술 과정을 개설하는 등 정부 예산을 받아 교육한 결과, 티스밸리 주민들은 일자리 회복과 투자 확대를 통해 산업 재생의 선순환을 몸소 체감하고 있다.
영국 리버풀·티스밸리=이다예기자 ties@ksilbo.co.kr
※이 기사는 한국기자협회와 (사)넥스트의 지원으로 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