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울산교육 발전에 헌신, 좌고우면 않았던 참교육자
상태바
[장성운의 울산현대史]울산교육 발전에 헌신, 좌고우면 않았던 참교육자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5.16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울산제일중학교 학생들이 1953년 학성동의 기와막 시대를 마감하고 복산동에 세워진 가교사에 들어가기 위해 책걸상을 옮기고 있다.

개교와 함께 학성동 기와막에서 공부했던 울산제일중학교 학생들이 초대 박관수 교장과 함께 잊지 못하는 교장 선생이 있다. 그가 3대 김삼도 교장이다. 박 교장은 6개월밖에 재임하지 않고 농림고등학교 교장으로 갔지만 재임 동안 ‘등에 업은 문수봉 지혜를 타고’로 시작되는 제일중 교가를 직접 작사하는 등 학교 초석 마련에 힘썼다.

제일중이 지붕이 허술해 교실에서 하늘이 보였던 기와막 시대를 마감하고 가교사를 지어 복산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김 교장이 기와막에 있는 동안 복산동에 가교사를 건립했기 때문이었다.

김 교장이 교장으로 근무한 때가 1953년 3월부터 1957년 2월까지였다. 김 교장은 경기고를 거쳐 일본 동양대학을 졸업한 후 해방 후 보광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언양중학교 교장을 거쳐 제일중 교장으로 왔다. 보광중학교는 통도사에서 운영했는데 통도사 스님 중에는 일본의 불교대학인 동양대학을 나온 사람이 유달리 많다.

울산 병영 출신으로 어릴 때 통도사에서 자랐던 서원출도 동양대학을 졸업한 후 나중에 보성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김 교장은 언양중학교 3대 교장이었고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김 교장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교사들은 그가 좌고우면하지 않았던 참교육자였다고 말한다. 예로 언양중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경남도 학무과에서 감사를 나왔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감사를 나오면 당연히 교장이 이들을 맞이하고 대접했다. 그런데 김 교장이 보이지 않아 도학무 과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언양중 교사들도 당황했는데 정작 김 교장은 이날 도학무과에서 감사를 나오는 것을 알면서도 삼남읍에 있었던 학교 실습장으로 가 묘목을 키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런 김 교장이 제일중 가교사 건립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지원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일중 4회 졸업생인 최종두 시인은 “6·25 당시 미군은 대민사업 차원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교사를 지을 수 없는 우리 농촌 학교를 상대로 건축 자재를 지원하는 일이 있었지만 김 교장이 어떤 인연으로 미군 부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지원 부대는 부산 해운대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즘은 학교를 지으려면 먼저 예산을 편성하고 건축 시공사들이 일을 시작하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전쟁 중이라 모든 물자가 부족해 교육청 예산으로 학교를 짓는다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자재는 지원받았지만 해운대에서 울산까지 자재를 옮기는 일도 쉽지 않아 동해남부선 열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열차로 건축 자재를 보내면 학성역에서 하역한 후 이 자재를 학생들이 학교까지 옮겨야 했다.

가교사 건립은 제일중 3회 졸업생인 권정식 전 제독의 회고록에 잘 나타나 있다.

“2학년 후반에 들자 학교는 가교사 짓는 일로 분주했다. 백양사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막은 곳에 마른 저수지가 있었고 저수지 동편에는 화장터가 보였다. 마른 저수지를 운동장으로 삼고 저수지 방둑 위에 목재로 가 건물을 세워 교실로 사용했다. 처음 며칠은 화장터 연기의 역겨운 냄새 때문에 점심 도시락을 먹을 수 없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갔다.”

권 전 제독은 이어 “한번은 학교에서 보니 화장터에 미군 앰뷸런스가 왔는데 젊은 여자 3~4명이 시체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뒤에 들은 얘기로는 장생포에서 온 양색시들이라 했다. 전쟁으로 인한 슬픈 사연이 없는 곳이 없었겠지만, 특히나 젊은 여자들이 겪는 고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슬픔을 대변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시절 장생포 일대에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소위 말하는 ‘양공주’들이 생겨나 이들이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힘든 삶을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학생들이 자재를 옮기는 일은 체육 시간에 많이 했다. 당시 체육 선생은 조진구였는데 체육 시간이 되면 운동장 대신 학성역으로 가 건축자재를 옮기는 일을 할 때가 잦았다.

당시 자재를 옮겼던 최종두 시인은 “체육시간이 되면 운동보다는 학성역까지 가 건축 자재를 옮겨야 할 때가 많았는데 시멘트와 블록은 등짐으로 그리고 철근은 4~5명이 어깨에 메고 함께 날랐다”고 회상한다.

최 시인은 또 “특히 자재 중에는 시멘트가 많았는데 당시만 해도 학생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조 선생님까지도 시멘트가 물에 묻으면 응고되는 것을 몰랐다. 따라서 작업이 끝나면 조 선생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태화강변으로 가 목욕시켰는데 그러면 학생들이 교복과 얼굴에 묻어 있는 시멘트를 물로 씻어내다가 오히려 시멘트가 굳어지는 바람에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건축 자재 중 시멘트는 풍족해 학교를 튼튼하게 건립하다 보니 학생들은 당시 가교사를 ‘감옥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1953년 5월 학생들이 이렇게 힘들어 건립했던 가교사로 옮긴 후 가교사 시대를 마감하고 콘크리트 2층 복합건물인 구교사로 옮긴 것이 가교사 입교 2년 뒤인 1955년 6월이었다.

김 교장은 좋은 교사들도 많이 초빙했다. 제일중이 복산동으로 이사 올 무렵에는 서울에서 피난 와 제일중에서 근무했던 교사들이 대거 서울로 가는 바람에 제일중은 교사 부족 현상이 심각했다.

이때 김 교장은 주위에 있는 교사들을 대거 영입했다.

영입된 교사 중에는 울산에서는 잘 알려진 시인 서전(瑞田) 이상숙과 소설가 박상지가 있다. 서전은 서울농대 출신으로 1960~1970년대 시내에 명 다방을 차려놓고 이 다방을 울산 문인들에게 문화공간으로 제공했다. 이후 서울로 간 그는 제일생명 전무이사로 있다가 타계했는데 현재 성신고등학교 앞동산에는 그의 시비가 있다. 박상지는 박성렬 초대 울산교육장의 아들로 나중에 서울로 가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이진영 선생도 당시 영입됐다. 이 선생은 한문 실력이 뛰어나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는데 김 교장은 이 선생을 우대해 그의 책걸상도 일반 교무실이 아닌 교장실에 두게 했다.

이 선생은 나중에 농림학교로 간 박관수 교장이 경북대학교 교무처장으로 갈 때 데리고 갔다. 경북대학교에서도 한문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이 선생은 나중에 국사편찬위원회에 들어가 일하다가 조계종 역경원에서 경전을 번역하기도 했다.

학교를 빛낸 학생들과 교사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4회 졸업생인 최종두 시인은 교내 연극대회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의 아들 원술랑 역을 맡아 연기를 잘하자 그를 따로 교무실로 불러 칭찬해 주었다.

그가 교장으로 있을 때 제일중은 축구의 전성기였다. 학생들 사이에는 ‘조빼낑’으로 더 잘 알려졌던 조진구 체육선생이 이끌었던 축구팀이 전국대회에서 준우승했던 때가 김 교장이 교장으로 있을 때였다.

제일중은 이때 서울에서 열렸던 전국대회에서 동북중학교와 결승전에서 패해 준우승했다.

이처럼 축구팀이 서울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자 김 교장은 결승전이 있기 전 조 선생에게 지시해 선수들을 일반 여관보다 시설과 음식이 훨씬 좋은 자기 친척집에서 숙식하도록 했다.

가난한 학생들도 자주 도왔다. 4회 졸업생인 김정헌 장군은 병영초등학교 졸업 후 제일중에 왔으나 학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이를 알았던 김 교장은 개인적으로 그를 도왔다. 김 장군은 제일중 졸업 후 부산고등학교를 거쳐 육사로 진학해 3군사관학교와 육사 교장까지 지냈지만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불행한 장군이었는데 김 장군에 대한 상세한 얘기는 다음에 쓸 예정이다.

김 교장은 재임 4년이 지난 1957년 서부 경남에서도 시골로 알려진 산청으로 전근을 갔다.

당시 제일중 교사였던 김창식 옹(2018년 작고)은 “당시만 해도 울산보다는 큰 진주와 마산이라는 도시가 있었고 또 산청이 김 교장의 고향이 가까운 서부 경남이다 보니 김 교장이 산청으로 갈 수 있었지만, 울산에 가족까지 다 와 살고 있었던 김 교장이 갑자기 산청으로 발령이 났을 때 교사들 대부분이 의외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실제로 김 교장의 아들 성태는 제일중 5회로 경남상고를 거쳐 고려대학교로 진학했다. 성태는 나중에 캐나다로 이민을 갔는데 캐나다 이민은 여동생이 먼저 가 있었다. 여동생은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후 취업 이민을 갔다.

김 교장 역시 정년 후에는 자녀들이 먼저 가 있던 캐나다로 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후 삶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1979년 12월 복산동을 떠나 태화동 시대를 열었던 제일중은 2017년에는 본관에 역사관을 건립해 개교 초기 이처럼 어렵게 공부했던 선배와 교사의 흔적을 담아 놓고 있다.

제일중이 떠난 후 복산동 옛 학교터에는 오랫동안 제일아파트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복산동 재개발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훨씬 더 많은 아파트가 옛 교정에 들어서고 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 곳곳 버려진 차량에 예산·행정 낭비
  • [지역민도 찾지 않는 울산의 역사·문화명소]울산 유일 보물 지정 불상인데…
  • 확 풀린 GB규제…울산 수혜 기대감
  • 궂은 날씨에도 울산 곳곳 꽃놀이 인파
  • [기고]울산의 랜드마크!
  • 이재명 대표에서 달려든 남성, 사복경찰에게 제압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