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논설실:뉴스 톺아보기]청기와, 울산제와에서 만들어 15만장 납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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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논설실:뉴스 톺아보기]청기와, 울산제와에서 만들어 15만장 납품
  • 정명숙 기자
  • 승인 2022.05.20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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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람객들이 북적이는 청와대. 본관의 지붕을 덮고 있는 청기와를 울산제와가 만들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취임과 함께 대통령의 관저와 집무실인 청와대가 일반 국민들에게 개방됐습니다. 윤대통령의 집무실은 용산 국방부 건물로 옮겼습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렸습니다만, 어쨌든 대통령 집무실은 옮겨갔고 청와대 관람을 희망하는 국민들이 줄을 섰습니다.

청와대가 대통령 집무실의 지붕을 덮고 있는 청기와에서 비롯된 만큼 새 집무실 이름으로는 계속 사용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 이름 그대로 우리 국민들에게로 돌아온 청와대의 그 청기와는 바로 울산사람이 운영하던 울산지역의 기와공장에서 만들었습니다. 청와대 개방과 청기와에 대해 살펴봅니다.
 

▲ 청와대에 청기와를 납품했던 울산제와공장 최상문 대표가 1991년 9월4일 청와대 준공식에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감사패.
▲ 청와대에 청기와를 납품했던 울산제와공장 최상문 대표가 1991년 9월4일 청와대 준공식에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감사패.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청와대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청와대는 언제 지어진 건물인가.

“지금의 청와대는 1991년 9월4일 준공된 건물로 그리 역사가 깊지 않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던 1988년 12월17일 신축이 결정돼 2년여간의 공사 끝에 완공했습니다. 그 전 대통령은 일본 총독이 관저로 사용하던 건물을 사용했습니다. 1910년 조선을 강제 점거한 일본이 경복궁 일대를 조선총독부의 건물로 사용하면서 후원에 있던 수궁(守宮) 등을 허물고 1939년 총독의 관저를 지었습니다. 그후 1945년 미군정기 미군정사령관의 거처로 사용하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이승만 대통령이 이어받아 집무실(1층) 겸 관저(2층)로 사용했습니다. 그 후 전두환 대통령까지 몇차례 이전과 신축 논의가 있었으나 노태우 대통령 때 와서 비로소 청와대 신축을 결정했습니다. 광복 후 45년이 지나도록 조선총독이 거주하던 곳을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는 것이 시대정신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 강력 제기돼 집무실과 관저를 새로 지은 것입니다. 청와대 건축은 현대건설이 맡았습니다.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을 참고했고 정주영 회장이 직접 문고리 모양까지 고를 정도로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청와대라는 이름은 언제 지어졌나.

부친으로부터 기와공장을 이어받은 최상문(1940~2008년·사진)씨

“청와대라는 이름은 윤보선 대통령 때 새로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청와대가 지어지기 전에 지어진 것입니다. 미군정으로부터 집무실을 이어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경복궁 북원에 있던 넓은 터의 이름인 경무대(景武臺)를 집무실 명칭으로 사용했습니다. 지금의 본관과 관저 사이에는 지금도 경무대터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당 정권에 대한 반감이 경무대라는 이름과 겹쳐지면서 원성의 대상이 되자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이름을 바꾸고 영어로는 Blue House라고 불렀습니다. 경무대는 건물이 전통 한옥은 아니었으나 지붕이 청기와로 덮여 있습니다. 청와대를 신축하면서 건물은 규모를 고려하여 양식을 혼용했으나 지붕은 정통 한옥 형식을 유지하면서 청기와를 얹어 청와대라는 이름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청와대의 본관과 관저 지붕을 덮고 있는 청기와는 우리 전통기와인가.

“청와대를 덮고 있는 청기와는 울산의 울산제와에서 만들었습니다. 부친으로부터 기와공장을 이어받은 최상문(1940~2008년·사진)씨는 문화재청에 등록돼 전통기와를 생산해오다가 궁궐 등에 사용하던 고급기와인 청기와를 만들었습니다. 청와대 지붕에 쓰인 청기와는 15만장이나 된다고 합니다. 청색을 띠는 청기와는 고려시대 때 양이정(養怡亭)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과 사찰 등에 청기와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현존하는 궁궐 전각 중에는 창덕궁의 선정전이 유일하게 청기와로 덮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청기와는 고급 전통기와인 셈입니다.”

-청기와가 흔치 않은 것은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인가.

“울산에서 동광기와를 운영했던 오세필씨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청기와를 제작하는 업체가 몇 군데 있긴 했으나 최상문씨가 만든 청기와가 각별히 뛰어났다고 합니다. 흔히들 청와대의 청기와를 도자기라고 알고 있으나 도자기는 아닙니다. 도자기 흙이 아닌 일반 기와 흙으로 구운 다음 청색 유약을 발라 한번 더 구워낸 것입니다. 일반기와를 구울 때의 온도가 980~1000도인데 비해 청기와는 1200도까지 올려야 합니다. 고온에서 구웠기 때문에 강도가 강했고 색깔도 뛰어났습니다. 고려 때는 도자기 기와였다고 하지만, 청와대를 건축할 때는 그 많은 기와를 만들 만한 도자기흙을 한꺼번에 구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를 도왔던 그의 아들 최경민(51)씨는 당시 청와대 신축공사 입찰에 참여해서 납품을 하게 됐는데, 기와의 크기와 문양 등이 보통 건물들과 달라서 수차례 시제품을 만드는 등 몇개월간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최종 납품 기와가 결정됐다고 회고했습니다.”

-지금은 청기와 생산을 하지 않나.

▲ 정명숙 논설실장
▲ 정명숙 논설실장

“최상문씨의 청기와는 청와대 건축 후 몇 군데 사찰과 공공건물에도 시공이 됐습니다. 울산에서는 석남사에서 최상문씨의 청기와를 볼 수 있습니다. 최상문씨는 청기와의 인기가 높아지자 범서 굴화에 있던 공장을 언양으로 옮겨 규모를 대거 확장했는데, 지나치게 규모를 키운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사업이 어렵게 되고 최상문씨는 69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청와대 지붕을 수리해야 할 경우 똑같은 기와를 공급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 기와공장에서 청기와를 만들기도 하지만 최상문씨의 기와 색깔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아무 기와나 가져다 보수를 하게 되면 보기가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황금기와를 만들었던 동광기와 오세필씨가 당시 최상문씨로부터 기술로 전수받아 만든 청기와를 어느 정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혹시 기와에 손상이 생기면 보수할 수 있도록 청와대가 원하면 기꺼이 기증을 하겠다고 합니다.”

정명숙 논설실장 ulsan1@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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