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화첩 울산의 풍경과 삶]처용의 관용정신과 목도의 생명력은 울산의 미래를 꿈꾸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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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화첩 울산의 풍경과 삶]처용의 관용정신과 목도의 생명력은 울산의 미래를 꿈꾸게해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6.14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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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處容岩目島所見(처용암목도소견)(75×53㎝. 韓紙에水墨淡彩. 2022)

◇처용은 관용이다. 울산의 정신이다

처용암은 울산시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앞 개운포에 있는 20여㎡(약 6평)의 바위섬이다. 처용암은 처용설화의 탄생지며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출현한 곳이다. 처용을 말할 때 처용이 누군인가에 대한 논쟁보다는 처용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가 중요하다. 처용은 급간이라는 벼슬을 했지만, 정치나 행정보다는 문화 예술가적인 행위를 한 인물이다. 처용이 처용가를 짓고 노래하고 춤추었다는 점이 그것을 말한다. 처용의 핵심은 처용가이다. 그것은 처용가에 담긴 ‘관용(寬容)’ 때문이다. 처용에서 관용이 없으면 벽사( 僻邪·사악한 것을 물리침)도 없고, 벽사가 없으면 진경(進慶·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함)도 없다. 벽사진경이 없었다면 처용에 관한 의식과 의례 등은 계승되지 못했을 것이다. 관용은 너그럽게 용서함을 이른다. 말로 하는 용서는 쉽지만, 관용은 어렵다. 예를 들어, “다시는 그런 잘못을 안 한다고 약속하면 용서하겠다”라고 조건을 다는 용서나 “너를 용서하겠다. 그리고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라고 선지자처럼 말하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용서한다고 잘못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용서는 공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 공정한 관계가 되려면 잘못하거나 죄를 지은 자의 뉘우침과 반성이 필요하다. 처용가를 다시 살펴보자.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다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처용가의 노래를 들은 역신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침과 동시에 “공(처용)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시니 감격스럽고 찬미하는 바입니다”라고 감동하면서, 처용의 형상만 봐도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처용이 보여준 관용의 결과다. 관용은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개방적 정신이다. 신라시대 울산은 변방 지역이다. 처용가와 처용설화는 울산 출신인 처용이 이루어낸 변방문화이다. 관용의 정신이 처용으로 대변되는 건강한 변방문화라면 역신은 타락하고 병든, 당시 귀족계층의 중앙문화다. 처용의 관용을 계승하여 벽사진경으로 나아간, 울산의 변방문화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현재 처용암은 주변 온산공단과 석유화학 공장, 용연 공단 등에 둘러싸여 있다. 세죽마을이 철거되고 처용공원이 조성되면서 옛 해변 풍광은 모두 사라졌다. 오직 처용암만이 천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목도는 원형적 삶의 보고다. 울산의 기적이다

목도는 온산 바다에 뜬 동해안에서 유일하게 조성된 상록수림 섬이다. 동백, 후박나무 등이 무성하여 절경을 이룬다. 1962년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했다. 목도는 울산이 공업화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화전놀이 가던 곳이다. 1980년 봄, 나는 섬 벚꽃이 피어 흩날리고 동백꽃이 무수히 떨어진 목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때 체험을 바탕으로 목도의 풍경을 졸시 <목도(目島)>에 담았다.

“고기 눈 속의 섬에서/ 내 사랑 여자는/ 동백꽃으로 지고 있다// 공장 굴뚝이 포신처럼 서 있는/ 바닷가 마을에/ 홀로 남아 버티는 느티나무여/ 쓸쓸한 희망이여/ 날 두고 가지마, 가지마// 섬 벚꽃 피어 바다로 날릴 때면/ 동해 남부선 따라/ 몰려오던 멸치 떼를,/ 은빛 비늘의 파도를 달래며/ 갈매기야 너 울지마, 울지마// 고기 눈 속의 섬에서/ 내 젖은 눈아/ 동백꽃으로 지지마, 지지마.”

공장지대에 갇힌 목도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화전놀이와 관련된, 원형적 삶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형적 이미지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원의 표시다. 바다와 동물과 꽃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진, 원형적 이미지는 우리를 안락과 평화의 세계로 이끈다. 현대 문명에 의해 그 같은 세계가 훼손되고 사라지고 있지만, 이미지 자체를 없애지 못한다.

세계는 선과 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종교와 도덕과 역사가 보지 못하는 빛과 어둠이 뒤섞여 있다. 원형적 이미지는 인간의 본향을 드러낸다.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고픈 소망을 지향한다. 원형적 이미지는,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삶은 더 삭막해져 가는 현실을 견디며 살게 한다. 목도는 원형적 삶의 보고다. 목도는 생태계의 초록 등대다. 그곳에서 나온 빛으로 하여 울산은 미래를 보는 시력을 회복한다. 생명력을 얻는다. 목도는 울산의 기적이다. 그림=최종국 한국화가·글=문영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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