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울산 사랑 남달랐던 화교…울산서예 발전에 한획 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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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울산 사랑 남달랐던 화교…울산서예 발전에 한획 그어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6.2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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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7년 병문안 차 타이완 타이중을 방문했던 류활열씨 가족이 소봉의 딸이 운영하는 병원 정원에서 휠체어에 탄 소봉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지난 2017년 병문안 차 타이완 타이중을 방문했던 류활열씨 가족이 소봉의 딸이 운영하는 병원 정원에서 휠체어에 탄 소봉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중국인 서예가 소봉(少峰) 모성수(牟性修) 선생이 지난 5월27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본명이 전량(傳良)인 고인은 생전에 본명 보다는 자(字)인 성수(性修)를 사용하기 더 좋아했다.

그의 죽음은 개인적으로는 70여 년이 넘는 유랑생활을 끝낸 것이고 울산 사람들로 볼 때는 귀중한 친구를 잃은 셈이다.

소봉이 눈을 감은 곳은 타이완(臺灣) 타이중(臺中)이었다. 타이중은 17세에 고향 산동성 안태를 떠나 70여 년 넘게 유랑생활을 했던 그가 울산 다음으로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그는 병세가 악화된 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타이중에 머물렀다.

고인의 유해는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들 유평이 타이중에서 울산까지 운반했다. 유해가 한국까지 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코로나로 귀국 절차가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로 부산에 도착했던 유해는 지난 6월13일 일단 부산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다음 날인 14일 울산 정토사에 봉안되었다.

부산에서 장례식을 치를 때는 부산 지인들은 물론이고 울산의 많은 문하생들이 부산까지 가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다.

타이중에서 눈을 감은 고인의 시신이 울산까지 옮겨져 봉안된 것은 고인의 유언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서예를 통해 울산 문화발전에 기여했고 서예 활동을 통해 번 많은 돈을 울산문화 창달을 위해 희사했다. 그는 또 울산 사업가들이 어려울 때는 기꺼이 돈을 빌려주어 울산에서 사업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와 친한 사람들이 많다.

그가 울산 문화발전에 기여한 것은 서예에 대한 끝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개발한 화법을 울산서예인들에게 가르치고 심어준 것이라고 하겠다.

1966년 화교로 울산에 왔던 그가 50여 년이 넘는 울산 생활을 접고 타이완으로 간 것이 10여 년 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하루도 붓을 놓지 않고 신정동 공업탑로터리 인근에 있던 자신의 서실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아 부산으로 가 큰딸 유리 집에서 2~3년 살면서 치료와 요양을 했다. 이때만 해도 그는 멀지 않아 울산으로 다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노환으로 별 차도가 없자 두 번째로 찾은 곳이 막내 딸 유희였다. 어린 시절을 울산에서 보내었던 유희는 이 무렵 타이중에서 남편과 함께 의사로 산부인과를 운영하고 있었다.

소봉이 이처럼 부산에서 타이완으로 갔다는 소문이 나면서 울산의 지인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들어 건강이 좋지 않아 전화 통화마저 힘들어지자 타이완으로 가 그를 직접 만나보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중에도 소봉이 울산에서 생활하는 동안 형제처럼 지냈던 류활열씨는 2017년 아들과 손자까지 데리고 타이중을 다녀왔다. 류씨가 다녀온 다음 해 ‘소봉서회’ 회원 7~8명도 타이중을 다녀왔다.

1929년 중국 산동성 태안에서 출생했던 소봉이 우리나라에 온 때가 1946년이었다. 이 무렵 중국에는 국민군과 공산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입대를 앞둔 중국 청년들은 국민당과 공산군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 했다.

군 입대를 앞두었던 소봉 역시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소봉의 가까운 친척이 내란이 끝날 때까지 잠시 서울에 왔다가 나중에 입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권유를 하는 바람에 서울로 온 것이 영원한 유랑의 길이 되었다.

한국에 사는 동안 그가 겪어야 했던 가장 큰 어려움이 언어였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 당시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충북 음성으로 가 청주대학에 입학해 우리 말과 글을 착실히 익혔던 그는 나중에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했던 그가 울산에 온 것이 1966년이었다. 이 무렵 울산은 우리나라 제일의 공업도시로 지정된 후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어 전국에서 수많은 근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러다 보니 울산에는 근로자들을 상대로 음식을 파는 중국식당이 늘어났다.

당시 원도심이었던 중구만 해도 신성원·신생원·북경원·신려도 등 많은 중국 식당이 있었다.

소봉이 울산으로 온 것은 중국 식당이 늘어나면서 화교 출신 학생들이 증가해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소봉이 울산에 올 때 울산의 화교 소학교는 학생 수가 증가하면서 예전의 학성동 구 울산역 앞에서 중구 북정동으로 옮겼다.

그는 3년간 이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다가 옥교동에 천성반점을 차렸다. 소봉이 울산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이 이때부터다. 식당을 운영하는 동안 울산 사람들이 서화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던 그는 신정동 공업탑로터리 인근에 서실을 열었다.

이후 그가 서예를 잘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천성반점을 찾았던 많은 울산 서예인들이 천성반점 대신 서실로 모여들었다. 이처럼 서예인들이 서실을 많이 찾자 1970년대 중반에는 식당 문을 닫고 서예를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당시 서실을 자주 찾은 울산 서예가가 김재호 박사와 류활열씨였다. 둘은 이 무렵 울산서도회를 창립하고 부산의 청남 오제봉 선생을 초빙해 서예를 한창 배우고 있었다.

이후 울산 서예인들을 상대로 중국화법을 가르쳤던 소봉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나라 화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광주로 가 그곳에 머물면서 의재 허백련 문하생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울산으로 와 이번에는 중국화법 대신 호남의 의재 화법을 울산 서예인들에게 가르쳤다.

류활열씨는 당시 소봉 서체에 대해 “글과 그림이 조화를 잘 이루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평정을 주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말한다. 이 무렵 소봉은 국전에도 여러 번 입상했다.

스스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소봉은 울산서도회 회장과 임원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울산에서 서도회 행사가 열릴 때마다 울산서도회 위상 정립과 서도의 대중화를 선도한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울산서도회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울산서도연구원’이 1972년 11월18일부터 24일까지 중구 성남동 가로수 다방에서 ‘추계 서예전’을 열었다. 이때부터 작품을 내어놓았던 그는 1973년 4월 울산서도연구원이 명칭을 울산서도회로 바꿀 때는 직접 각(刻)을 파 선사했고 이후에도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작품을 내어 그 수익금을 서도회 발전을 위해 희사했다.

특히 1981년 울산시가 시립도서관 건립을 위해 기금 마련을 할 때는 ‘소봉 모성수 서화전’을 열고 자신의 그림과 기증받은 작품을 팔아 모은 50여만원의 수익금을 당시 이순동 시장에게 전달했다. 이런 선행으로 그는 그해 울산시 명예시민이 되었다.

울산에서 생활이 안정된 후에는 고향 안태를 찾아가 부모를 만났다. 고향을 떠난 지 30여 년이 훨씬 넘은 1983년 그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찾았는데 그때까지 부모가 모두 살아계셔 눈물의 상봉을 했다.

그가 이처럼 한국에서 자리 잡자 울산 지인들은 그에게 한국에 귀화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소봉은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외국에 나와 있는 중국인이 중국 국적마저 포기하면 중국인으로 반드시 가져야 할 애국심이 없어진다”면서 “외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이 모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애국이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끝내 귀화를 거절했다.

소봉은 한국에 사는 동안 4남 3녀를 두었는데 이들이 현재 한국과 타이완 그리고 미국에서 살고 있다.

소봉은 떠났지만 아직 울산에는 그의 글이 많이 남아 있다. 그의 유해가 봉안된 정토사 입구에는 ‘蔚山公園墓地(울산공원묘지)’라는 그가 쓴 큰 비석이 있다. 이 글은 공원묘지가 처음 조성되었을 때 소봉의 글체가 뛰어남을 알았던 공원묘지 측에서 요청해 썼다. 또 농소의 학성이씨 재실 ‘寒泉齋(한천재)’와 양정의 문화류씨 재실 ‘晩楓亭(만풍정)’의 현판과 주련도 소봉 글씨다. 또 국수봉 은을암 아래 있는 ‘飛鴻山房(비홍산방)’ 글도 그의 솜씨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소봉이 한 때 교사로 활동했던 북정동 울산화교 소학교는 그동안 학생 숫자가 줄어들면서 문을 닫았다.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건물은 중국인 소유가 되어 이후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지금은 이웃 건물과 함께 이 건물도 철거를 기다리고 있다.

1980~1990년대 번창했던 중국 음식점도 그동안 많이 줄어들었다. 한때 청요리로 유명했던 ‘반점’들이 남구가 번창하면서 이곳으로 옮겨가기도 했고 일부 식당들은 아예 문을 닫았다. 지금은 우정동에 있는 영안반점이 그나마 중국식당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울산에는 소봉으로부터 서화법을 배웠던 류활열씨 등 울산서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1980년부터 ‘울산 서화연구회’를 만들어 소봉의 서체를 공부해 오고 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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