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해방후 울산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나 흔적 쉬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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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해방후 울산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나 흔적 쉬 사라져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7.11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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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 있는 우석 이후락의 생가가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가 아쉬움을 주고 있다. 우석은 이 집에서 웅촌초등학교를 다니는 등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명당 근재공 고택이 있는 석천리 인물 중 우석 이후락을 빼놓을 수 없다.

해방 후 울산 출신 인물 중 우석은 가장 울산발전에 기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업적에 비해 그가 남긴 발자취는 너무 빨리 사라지고 있다.

우석은 비록 박정희 대통령 후반기에는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와 있었지만 그의 부침은 박 대통령과 같이했다.

학성이씨 시조 이예의 17세손으로 1924년 석천리에서 태어났던 우석은 웅촌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거리상 어린이 아장걸음으로는 웅촌 면소재지에 있던 초등학교가 멀었지만 그때는 대부분의 농촌 어린이들의 통학거리가 이 정도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농업전수학교로 진학했다. 학교는 남구 신정동에 있어 석천리에서는 걸어서 다닐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때 마침 시집을 가 중구 교동에 살고 있던 누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누나 집에서도 학교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열심히 다녔다.

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특히 영어를 좋아해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우기 위해 화장실에서도 영어 단어를 써 벽에 붙여놓고 용변을 보았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입교한 것 역시 고교 시절부터 이처럼 뛰어난 영어 실력이 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군사영어학교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우석은 별 하나를 달고 워싱턴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무관실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모교인 울산농고 후배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었는데 이 편지가 진학을 앞둔 당시 후배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울산농고 제16회로 고교 시절 학생회장을 지냈던 권정식 전 제독의 회고다.

‘고교 3학년이 되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정 경제가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데 당시 6·25로 서울에서 오신 선생님이 많았는데 이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진학할 것을 권했다.

하루는 미국에서 편지 한 장이 학생회장인 내 앞으로 날아왔다. 봉투를 보니 워싱턴 주재 대한미국 대사관 무관실장 육군 준장 이후락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속에는 편지가 있었다. 나는 이 편지를 아침 조례시간에 연단에 올라가 읽었다. 편지 내용은 ‘세계는 넓다. 우리 후배들이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이 넓은 미국 땅으로 활동무대를 넓혀보라’는 요지의 격려에 찬 글이었다.

겨울 방학이 되자 이전에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모습의 육·해군 사관학교의 재학 중이던 선배님들이 학교로 찾아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해 가슴 태우던 내 앞에 희미하게나마 가야 할 길이 보이는 듯 했다.’

5·16 후 최고회의 공보실장 때부터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던 우석은 박 대통령이 권좌에 있는 동안 대통령 비서실장, 주일대사, 중정부장,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비서실장으로 있을 당시는 울산공단 조성에 기여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동해의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던 울산이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이때부터다. 고태진과 정택락 등이 벼락출세를 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전까지만 해도 고씨는 지방 은행 지점장으로 있다가 우석의 배려로 제일은행 전무를 거쳐 조흥은행장까지 되었다. 정씨 역시 이전에는 울산의 농협 임원으로 있었지만 이후락의 비서실장이 된 후에는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 사무실을 열어놓고 우석을 만나려는 장차관들의 줄 세우는 일을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는 동안 우석이 울산 발전을 위해 한일 중 가장 손꼽을 수 있는 일이 울산육영회를 만들어 울산교육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일이다.

울산은 울산육영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교육의 불모지였다. 대학은 전무한 상태였고 중고등학교도 2~3개밖에 되지 않아 울산 어린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진학을 하려면 부산과 대구 등 외지로 나가야 해 이에 따른 학생과 학부모들의 어려움이 많았다.

우석이 울산육영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육영사업에 뛰어든 때가 1966년 11월이었다. 이후 우석은 울산여자상업학교를 필두로 언양여상(현 울산산업고), 언양여중(현 신언중학교)과 나중에 설립한 학성중·학성고·우석고(현 신정고) 등 7개교를 신설한 후 모두 울산육영회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이 학교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전국에서 명문대학 출신 우수 교사들을 채용했다.

또 당시만 해도 전력부족으로 학생들이 방과 후 학교에 남아 과외수업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우석은 학생들이 전기부족으로 과외 수업을 못 하는 일이 없도록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사 예우도 공립에 뒤지지 않도록 해 육영회가 운영하는 학교가 전국의 명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울산대학교 설립도 우석이 앞장섰다. 울산대학교에는 이런 우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학교건물 중 한곳을 ‘우석관’이라고 명명했지만 언제부터인지 이 이름이 사라져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때도 울산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우선 그는 울산 출신 인재들을 대거 등용해 이들을 요직에 앉혔는데 이장우 비서실장, 이재걸 감찰실장, 허용만 국장 등이 모두 울산 출신이다.

석천리에서 우석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장소로는 생가와 육석정, 마을 서편 산중에 있는 문중 산소가 있다. 그러나 이중 부친 산소를 제외한 생가와 육석정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다.

생가는 근재공 고택 바로 남쪽에 있다. 좁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택과 생가가 있다. 풍수상으로 보면 붕어꼬리 부분인 근재공 고택과 몸통 부분인 동뫼를 연결하는 허리 부분이다. 우석은 이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살았다.

생가는 오랫동안 가족들이 지켜왔지만 이미 오래전 우석의 후손이 팔아 지금은 남의 소유가 되어 있다. 당초 문중은 이 집터에 우석 기념관을 지을 예정이었다. 지금도 빈터로 있는 이 집터에는 ‘李厚洛 生家(이후락 생가)’라는 간판과 함께 밑에는 ‘복원추진위원회’라고 쓰여 있어 쓸쓸함을 준다.

육석정은 생가에서 회야강 쪽으로 300m 정도 나가면 찻길 옆에 있었다. 위치로 보면 석계서원 바로 동편에 자리 잡았다. 이 별장은 우석이 권력의 정점에 있던 1966년 건립했다. 이 집은 우석이 권좌에 있었던 1960~1970년대만 해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우석이 이 별장에 나타나면 여당 국회의원들과 별을 단 장성들이 우석을 알현하기 위해 줄을 섰다. 때로는 우석이 이곳에서 안방정치도 했다. 7대 총선에서 우석이 지지했던 공화당의 설두화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성탁 때문에 낙선이 될 위기를 맞자 김 후보를 불러 후보를 철회시킨 곳이 이 별장이었다.

또 10·26사태 때는 일본 후쿠다 전 수상으로부터 박 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서울로 바로 향했던 곳도 이 별장이었다. 후쿠다 수상은 나중에 수상에서 물러난 후 직접 이 별장을 찾아와 우석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 건물 역시 지금은 흔적이 없다.

회야강이 앞으로 흐르고 강 건너에는 산이 병풍처럼 싸고 있어 경관이 좋았던 이 별장에는 소나무와 동백나무, 히말라야시더 등 정원수와 푸른 잔디가 깔려 봄과 가을에는 웅촌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건물 역시 우석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 관리인 없이 빈 집으로 있다가 2006년에는 남의 손으로 넘어가 육석정은 철거되고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서편 산에 있는 우석 부친의 산소도 그동안 자리를 여러 번 옮겼다. 처음 부산 진구 당감동에 있었던 이 산소는 우석이 권좌에 있을 때 이곳으로 이장했고 주위에 문중 산소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우석이 중정부장으로 있을 때 한 지관이 산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해 한동안 의정부로 갔다가 우석이 타계한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이장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도심에 우석의 편린이 남아 있는 곳으로 울산여상이 있다. 울산여상 기념관에는 ‘頌德(송덕)’이라는 제목 속에 이 학교 졸업생들이 우석에게 바치는 글이 새겨진 부조가 있다. 학생들이 이 부조를 세웠을 때 우석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부조 아래에는 우석의 약력이 있고 부조 옆에는 우석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러나 이 부조도 당초는 울산여상의 중심 건물에 있었지만 지금은 구석진 곳으로 옮겨져 있다. 또 하나 흔적은 학성고 입구에 있다. 학교에 들어서면 왼편에 충혼탑이 있다. 탑의 맨 위에는 우석의 친필인 ‘忠孝(충효)’라는 글이 있다.

뒷면을 보면 이 탑이 1978년 11월 건립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무렵 우석은 10대 총선에 출마해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였다.

우석의 업적을 보면 울산 도심에 큰 동상과 공적비를 세워도 모자랄 지경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석의 업적이 우리 기억에서 멀어지는 것도 안타깝지만 그의 후손들과 문중이 지키지 못한 흔적을 지켜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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