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1980~1990년대 울산지역 소설계 주도하던 전국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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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1980~1990년대 울산지역 소설계 주도하던 전국구 작가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7.1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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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용 작가는 처음 울산에 왔을 때 마땅한 거처가 없어 북구 송정 박종해 시인의 집에 있던 양정재에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썼다. 지금은 송정이 재개발되는 바람에 양정재가 박상진의사 역사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올해는 1980~90년대 울산을 대표하는 소설가 김수용 작가가 영면한 지 꼭 10주년이 되는 해다.

2012년 김수용 작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 지역 신문은 “울산에서 숱한 화제를 뿌리며 한때 울산지역 소설계를 주도했던 김수용 작가가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해방 후 울산은 많은 작가를 배출했지만, 이들 중에도 김 작가는 가장 많은 화제를 남겼다. 한때는 경남도의원 후보로 선거에도 발을 들여놓았던 그의 기행과 명성은 울산을 넘어 전국구였다. 1991년 서울에서 발간한 <한국현대문인대사전>에는 울산의 몇 안 되는 작가 반열에 그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1952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던 김 작가는 1970년대 말 울산으로 온 후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중학교 때부터 이상 작품에 매료됐고 또 이문구 선생의 독특한 문체가 좋아 그의 수필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이상은 자신에게 문학 관련해 많은 영감을 주었지만, 자신이 문학도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고인이 되어 아쉬웠다고 했다. 이에 반해 이문구 작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호감을 가졌다.

한때는 이문구 작품의 풍부한 어휘력에 심취돼 이씨에게 자신의 습작을 편지로 보내기도 했는데 그때면 이씨가 맞춤법과 어휘 등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나중에 이문구 선생이 자신에게 가르쳐 준 문학의 가장 귀중한 교훈이 ‘세상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 작가가 울산 문인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서상연 시인을 만나면서다. 1980년대 초반 당시 울산문인협회 회장이었던 서 시인은 울산 중구 성남동에서 신문지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때 서 시인을 찾아왔던 그는 <울산문학>을 한 권 달라고 했다. 서 시인은 이때만 해도 김 작가가 전혀 문학도처럼 보이지 않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후 서 시인을 자주 찾았던 그는 어느 날 문협 사무실에서 당시 울산고등학교 교사였던 박종해 시인을 만났다. 이후 둘은 자주 술을 마셨는데 박 시인은 의외로 그가 문학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어느 날 김 작가가 박 시인의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 박 시인이 북구 송정동에 있었던 자신의 거처인 양정재로 데리고 갔다. 그날도 둘은 양정재에서 술을 많이 마셨다. 이 자리에서 김 작가는 자신이 양정재에 살면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고 술김에 박 시인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김 작가가 양정재로 이사를 했다. 박 시인의 얘기다.

“김수용이 우리 집에 와 나와 술을 마신 3~4일 후로 생각됩니다. 그때 내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집사람이 전화로 ‘웬 낯선 젊은이가 가족과 함께 리어카에 짐을 싣고 집에 와 내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내가 김수용이 온 것을 알고 ‘그 친구 앞으로 대단한 작가가 될 사람이니 그렇게 알고 이삿짐을 우리 집에 풀도록 하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람이 ‘이런 일이라면 사전에 나에게 귀띔이라도 해야지 나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우리 집에 이사를 올 수 있냐’면서 불평해 내가 곤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때부터 박 시인과 김 작가는 한 집에서 좋아하는 술을 함께 마시면서 생활했다. 김 작가가 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그는 양정재에 머무는 동안 신춘문예에 여러 번 응모해 마지막 심사까지 오를 때도 있었지만 당선은 못 되었다.

김 작가가 작가로 명성을 얻은 것이 1981년 장편소설 ‘청맹과니들의 노래’가 당선되면서다. 이 작품은 울산의 한 중학교 교사인 주인공이 여름방학 한 달 동안 겪은 이야기를 작품화한 것으로, 진정한 자유를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1986년에는 한국방송 60주년 기념 미니 시리즈 모집에 ‘그 일몰’이 당선됐다.

당시 김 작가를 옆에서 지켜본 박 시인의 얘기다.

“김수용은 우리 집에서 술도 많이 마셨지만, 글도 많이 썼습니다. 그것도 남들이 다 자는 한밤에 그는 끝없이 글을 썼고 그때 쓴 글이 여러 번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한때는 수용이가 양정재의 정기를 모두 받아 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박 시인은 나중에 ‘한담 1’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김 작가의 삶을 보여주는 시를 썼다.

소설가 김수용이 길은 토끼 한 마리/ 안주하야 오늘을 잘 취했다.(중략)

우리 김 형은 자기 손으로 길렀던 것을 자기 손으로 잡아서/ 자기 손으로 요리한 것이 뒤늦게 좀 머쓱하였던지/ 거 무슨 양심 같은 단어가 갑자기 떠올랐던지/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다며/ 연거푸 독한 소주만 축을 내는데(후략)

이처럼 김수용 작가에게 문학도의 꿈을 키워주었던 양정재는 수십 년 전 송정마을이 철거되면서 지금은 박상진의사 역사공원으로 옮겨 세워져 있다. 안내문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이 정자는 세련되고 격식을 갖춘 ‘정(丁)자’형 건물인데 영남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건축양식이기 때문에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설명해 놓고 있다.

그동안 방 한 칸 없이 쪼들린 생활을 했던 김 작가는 양정재에 사는 동안 전국적으로 알려진 작가가 되어 울산 도심으로 이사했는데 그때 그가 구입했던 집이 복산동 홍수진 작가가 살았던 아파트였다.

나중에 울산MBC에서 함께 근무하는 홍 작가는 이때 시내 음악다방에서 DJ로 활동하고 있었다. 1985년경에는 박 시인이 울산문협 회장이 되면서 그가 울산문협 사무국장이 되었다. 박 시인은 문협 회장이 된 후 문협지를 출판하기 위해 지인들로부터 100여만원의 돈을 모아 김수용에게 맡겼다.

당시만 해도 문협은 울산시의 보조 없이 자체적으로 경비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런데 연말이 되어 박 시인이 책을 만들기 위해 김 작가에게 맡겨놓은 돈을 가져오라 하니 그가 책값을 이미 다른 용도로 모두 썼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박 시인은 “돈을 내 허락 없이 어디에 썼느냐”고 나무라자 그는 태연히 “문협을 찾아오는 문인들에게 밥을 사 주느라고 돈을 모두 썼다”고 얘기했다.

그때만 해도 집에서 아침을 먹고는 당시 울산 중구 북정동 고기업씨 양조장 건물에 세 들어 있던 문협 사무실에 와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소위 말하는 ‘울산의 문화 건달들’이 많았다. 이들의 희망이 새해에 발표하는 신춘문예 당선이었지만 울산 작가 중 당선은 물론이고 입선도 하는 문인이 없었다.

이들이 이처럼 매일 입만 갖고 문협에서 소일하다 보니 점심을 사무국장이 살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출판비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김 작가는 박 시인의 도움으로 울산MBC에서는 작가로, 울산시청에서는 6급 공무원으로 추천받아 일했다.

울산MBC에 입사할 때는 박 시인이 당시 박동훈 국장에게 입사를 부탁했는데 심사는 최영수 국장이 했다. 최 국장 얘기다.

“심사할 때까지만 해도 김수용이 누구인지 몰라 그의 전직이 궁금해 물었더니 그가 서슴없이 ‘이 자리에 오기 전 까지만 해도 바로 방송국 앞에서 호떡을 팔았습니다’고 서슴없이 말해 심사위원들이 모두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김 작가는 입사 후 처음에는 소설형식으로 방송 원고를 쓰는 바람에 지적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불매’ ‘명(命)’ ‘쫄병 전선’ ‘기(氣)’ ‘금자(金尺)’ ‘대평원의 황제’와 ‘공단동 128번지’ ‘니만 알고 있거래이’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중 ‘불매’는 구한말 쇠부리터와 북구 달천의 토철광산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동학혁명과 경술국치 등 역사적 격변기를 헤쳐 나와야 했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이 글은 자료수집과 집필에 무려 7년이나 걸렸다.

‘명(命)’은 스포츠 신문에 연재했는데 글의 내용이 인간에게 운명이라는 것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을 탐구하는 역학을 어느 정도 알아야 쓸 수 있는 글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이 글을 쓸 때 짧은 역학 실력으로 어설프게 달려들었다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때 상황을 그는 이렇게 기술해 놓고 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명’을 쓰면서 나는 내 역학 실력으로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쯤이었다. 그때 대구 모처에 비와 구름까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초인이 한 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처음 이 소문을 들을 때만 해도 우매한 대중을 현혹하기 위한 잔재주를 가진 사람이구나 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만난 후에는 내 생각에 큰 변화가 생겼다. 우리가 극히 작은 물질이나 극한 상황을 볼 수 없듯이 내 의지로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한 것이 큰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겸손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우주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침마다 산에 올라가 보잘것없는 내 몸이지만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했다.

나중에 그가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소리를 주위 사람들에게서 들은 것은 이런 신기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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