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울산 근현대사의 산실…중구 재개발로 대책없이 사라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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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울산 근현대사의 산실…중구 재개발로 대책없이 사라질판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9.1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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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기자협회와 신간회 모임 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렸고 해방 후에는 울산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앞장서는 등 울산문화의 산실 역할을 했던 3·1회관이 아무런 계획 없이 철거 위기에 놓여 울산시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울산광역시 중구 북정동에 있는 3·1회관은 울산의 근현대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3·1운동 직후 건립되었는데 건립 당시만 해도 이름이 울산청년회관이었다.

그런데 최근 복산동과 우정동에 재개발의 미명 아래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 건물이 흔적 없이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다.

경술국치 후 무단정치로 우리 민족의 숨통을 조였던 일제는 3·1운동 후 청년운동과 신문 발간을 허용하면서 그나마 조선인들이 숨 쉴 수 있도록 했다.

이 무렵 울산에서도 타지역과 마찬가지로 각 면 단위로 청년운동이 불길처럼 솟아올랐지만 정작 이들이 청년운동을 벌일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울산청년단을 대표했던 박병호(朴秉鎬)·손정수(孫禎秀)·박남극(朴南極)·박주복(朴周馥)·이규명(李圭明)·차용규(車溶珪) 등 청년들이 개화파 김홍조(金弘祚) 옹을 비롯한 울산지역 유지들로부터 성금을 얻어 1919년 후반 북정동 언덕바지에 지은 건물이 3·1회관이었다.

이후 청년들은 이 건물에서 울산 군민들을 상대로 독립 정신을 함양하고 애국심을 계몽하는 강연을 했다. 또 야학을 열고 심지어는 활동사진과 신파극을 보여주면서 문화운동을 벌였다. 당시 이 건물은 울산 군민들에게 항일 운동과 문화행사의 산실 역할을 했다.

처음 건립될 때만 해도 이 건물은 양철지붕의 단층 건물로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2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마루가 있었다. 그리고 마루를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33.06㎡(약 10평) 정도의 온돌방이 있었고, 왼편에는 16.53㎡(약 5평) 정도의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았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고층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집은 비록 단층이었지만, 시가지 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높은 건물이었다. 더욱이 건물 앞마당에는 미끄럼틀이 있어 인근 마을 어린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곳에서 놀았다.

또 울산 출신의 일본 유학생들은 방학 때면 대한해협을 넘어와 이곳에서 울산 군민들을 상대로 귀국보고회를 갖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난했다. 유학생들이 귀국 보고회를 열 때면 울산 읍민들은 물론이고 멀리 농어촌의 군민들까지 모여들어 건물이 만원을 이루었다. 귀국 보고회가 이처럼 호응이 좋다 보니 나중에는 면 소재지를 찾아다니면서 순회 보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유학생들의 보고회는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자주 보도됐다.

또 그때는 중학 과정을 가르치는 학교가 울산에는 부족해 이곳에서 야학이 문을 열어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 울산 꿈나무들을 위한 최초의 사립유치원도 이곳에서 개원했다.

당시 야학으로 가장 유명했던 교사가 안태노였다. 1920년대 웅촌에서 야학을 시작했던 안씨는 울산으로 와 성남동과 옥교동 일대에서 야학을 펼치던 중 학생들이 늘어나자 교실이 부족해 1930년부터는 이 건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1931년 5월5월 어린이날에는 수업 중 만세삼창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건물에서 유치원이 개원된 것은 1930년이다. 이때 울산의 거부 오덕상이 유치원을 개원해 초대 원장이 됐다. 일제강점기 울산 옥교동에서 최초의 양식 그릴을 열기도 했던 그가 유치원 제1회 졸업생과 함께 학성공원으로 봄 소풍을 가 벚꽃이 휘날리는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 있다. 당시 유치원 보모는 이성출이었는데 그의 모습도 사진 앞줄 중앙에 보인다.

1926년 울산기자협회가 창립될 당시 기자들이 회합을 가진 장소도 이 건물이었다. 당시 왜경이 기자협회 결성을 반대하는 바람에 논쟁이 심했고 이 때문에 창립 일자가 여러 번 연기되기도 했다. 창립총회는 동아일보 박병호, 조선일보 김기오, 시대일보 강철 기자가 선도했다. 이중 박 기자는 나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탐정 소설로 알려진 <혈가사> 작가가 됐고, 김 기자는 서울로 가 지금까지 속간되고 있는 <현대문학>을 창간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내내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강 기자는 해방 후 행방불명이 됐다.

1928년 창립총회를 가진 울산신간회 지회도 이 건물을 회의장으로 자주 사용했다. 이때도 왜경은 신간회 모임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탄압했지만, 신간회 회원들은 이 건물에서 회의를 자주 개최했다.

이런 애국 활동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해방됐을 때는 울산건국청년단이 이곳에 사무실을 두고 신탁통치로 치안 부재였던 울산의 혼란을 수습했다. 울산건국청년단은 해방 하루 뒤인 8월16일 결성됐고, 초대 회장이 김태근이었다. 울산건국청년단은 이후 중앙에 대한청년단이 결성되면서 이 단체와 연계해 각종 사회활동을 벌였다.

6·25가 일어났을 때는 울산청년들이 이곳에서 단기 훈련을 받고 전방 부대로 배치됐는데 이들 중에는 전투를 벌이다가 목숨을 잃었던 병사들도 많았다. 6·25 후 잠시 미군 통신부대가 주둔하기도 했는데 이때 이곳에서 일한 미군들은 울산초등학교 앞에 있던 학성여관에 거처를 두고 출퇴근했다. 통신부대는 이후 성남동 구 소방서 자리로 이전했다. 울산농고에 제23 육군병원이 들어서 울산초등학교가 이 병원의 분교가 됐을 때는 울산초등학교 학생들이 이 건물을 임시 교실로 사용했다.

울산에 그럴듯한 예식장이 없었던 1960~1970년대에는 예식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이 건물은 1980~1990년대에는 강현필 선생이 ‘시민대학’ 간판을 걸어 놓고 시민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때는 강 선생의 초청으로 김형석과 안병욱 등 중앙의 저명인사들이 초빙돼 울산시민들을 상대로 강연했다.

이유수와 김석보 등 울산의 향토사학자들이 이 건물에 ‘울산향토사 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시민들을 상대로 향토사를 가르치고 유적지 탐방을 하기도 했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향토사교육은 이유수와 김석보 등이 돌아간 후에도 회장이 바뀌면서 얼마 전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까지 지속됐다. 지금도 2층 건물 일부를 이 단체가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다.

애초 울산청년회관으로 불리었던 이 건물이 언제부터 3·1회관으로 개칭됐는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울산군이 울산시로 승격했던 1960년대 초 울산 읍장을 지냈던 고기업이 사비로 이 건물을 개축하게 되는데 그때 회관 명칭도 개칭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건물은 애초 1층 목조 건물이었는데 고씨가 개축하면서 지금의 2층 콘크리트 건물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해방 후 초대 울산건국청년단 지회장을 지내면서 이 건물을 사용했던 김태근은 그의 저서 <함월산>에서 “울산청년회관은 3·1운동과 조국광복, 6·25 등 반세기 역사를 통해 때로는 민족의식 계발의 산실이었고 때로는 독립정신과 호국이념을 연마하는 도장이었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공업도시 울산의 역사를 지켜보았던 이 건물이 소리 소문 없이 철거 위기를 맞게 된 것은 이 일대가 재개발되면서다. 실제로 이 건물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울산초등학교는 오래전 이미 혁신도시로 이전했고 옛 중부경찰서 자리에도 시립미술관이 들어섰다.

이와 함께 주위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3·1회관이 있는 장소는 대형차들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로 계획이 잡혀 머지않아 철거될 운명에 있다.

이 지역 재개발은 ‘울산의 원도심’으로 불리었던 옛 중구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다. 그것도 귀중한 문화유산과 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박병호와 손정수 등 유명인들에 대한 기록과 흔적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뜯어내고 있다.

박병호는 일제강점기 언론을 통해 항일운동을 펼쳤고 손정수는 해방 후 김구 선생이 만든 학독당 조직부장을 맡았던 울산 출신의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그들은 각각 복산동과 옥교동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도심의 개발로 이들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오랫동안 울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해 온 허영란 울산대 교수는 “중구에는 비록 임진왜란 때 모두 헐리기는 했지만 그나마 울산읍성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어 문화도시의 면모를 지켜왔는데 이렇게 아파트 건설로 도시가 마구잡이로 뜯겨나가다 보면 우리가 희망하는 ‘문화도시 울산’은 기대하기 힘들다”면서 아쉬워했다. 허 교수는 3·1회관 철거 계획에 대해서도 “이런 귀중한 문화유산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힘들다면 최소한의 개발로 문화공간의 기능을 살려 타 지역에 있는 역사기록관으로 리모델링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강혜순 중구의회 의장도 “오래전 사라진 옛 울산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객사도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울산시가 이처럼 울산 근현대사의 산실로 볼 수 있는 건물을 아무런 대책 없이 철거하려는 계획은 울산의 올바른 문화정책을 위해서라도 지양돼야 한다”고 말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해방 후 이 건물에서 오랫동안 울산의 치안유지를 위해 힘썼던 김태근 옹은 그의 저서 <함월산>에서 “3·1회관은 울산 군민의 혈육이 결부된 오직 하나의 유산이기에 해방 후 그렇게 발호했던 모리배들도 감히 이 건물을 잡아먹지 못했다”면서 “이 건물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리움의 요람이기에 울산의 문화는 이 청년회관의 역사를 배경으로 소재를 찾고 또 울산문화운동의 방향도 이 건물을 중심으로 설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방 후 혼돈의 시대에도 모리배들이 감히 잡아먹지 못했던 3·1회관이 요즘 들어 사라질 위기에 있다는 것은 오늘을 울산에서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운 일임이 틀림없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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