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명의 소문에 매일 200여명 환자 몰려…대형사고땐 밤 지새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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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명의 소문에 매일 200여명 환자 몰려…대형사고땐 밤 지새기도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10.2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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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청도 출신의 김철희 원장은 1960~70년대 시계탑사거리 인근에서 김외과의원을 운영했다. 당시로는 울산에서 가장 많은 환자를 진료해 병원이 항상 북적였다. 옛 병원 자리에는 지금은 식당이 들어서 있다.

울산 중구 시계탑 사거리에서 경남은행 쪽으로 보면 ‘고궁’이라는 간판이 걸린 식당이 있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있는 이 식당이 한동안 환자들이 넘쳐났던 병원 자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5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김 내과가 있었던 이 자리는 김철희 원장이 갑작스러운 서거로 문을 닫을 때까지 항상 환자로 북적였다.

경북 청도 출신의 김 원장이 울산에 온 때가 1959년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울산은 군 단위 행정 도시로 인구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김 원장이 병원을 차린 2~3년 후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되면서 공장이 많아지게 되었고 이들 공장에서 각종 사고로 부상자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김 외과로 몰려들어 환자들이 넘쳐났다.

경북의대 후배로 시계탑 사거리에서 1966년 내과를 차렸던 이정호 원장은 김 원장이 군의관으로 울산에서 근무하다가 울산에 자리 잡게 됐다고 말한다. 이 원장은 김 원장이 1946년 경북의대를 졸업한 후 6·25가 일어나자 울산농고에 자리 잡은 제23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다가 울산에 병원을 차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김 원장이 울산에 병원을 차릴 때만 해도 울산 도심에는 병원이 많지 않았다. 당시 시내에는 울산초등학교 앞에서 김재호 박사가 대동병원을 운영했고, 시계탑 현 신한은행 자리에는 조 내과, 구 중구 소방서 자리에 윤 외과가 있었다. 또 시계탑에서 멀리 떨어진 학산동에 구호병원이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 이들 중 입원실을 가진 병원은 없었다. 김 원장 역시 울산에서 개업할 때만 해도 병원 시설이 열악했다. 현 경남은행 앞 고운 미용실 자리에 있었던 4~5칸 되는 건물에서 부인 배원수(裵元壽), 김도룡씨와 함께 병원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부인 배씨가 수납을 보았고 청도의 고향 후배인 김씨는 병원 집사 역할을 했다. 10여 년 뒤면 이들의 업무도 바뀌어 김씨는 방사선 일을 했고 배씨가 보았던 수납 일은 새로 들어온 박점애씨가 대신했다. 나중에 김씨와 박씨는 결혼까지 하게 된다.

공단에 공장이 많이 들어서면서 환자들도 늘어났다. 당시만 해도 공단의 공장들이 안전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각종 사고로 부상자들이 많았고, 이들이 수술을 잘한다고 소문이 났던 김 외과로 몰려들었다. 간판은 외과를 달았지만 김 원장은 외과 환자들만 보지 않았다. 내과는 물론이고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심지어는 치과 환자들까지 진료했다.

김 외과 환자는 이들만이 아니었다.

울산 장날이면 교통사고로 다친 부상자들도 몰려들었다. 당시는 울산에 장이 서면 변두리 농어촌에서 많은 사람이 장을 찾았다. 당시 장차는 대부분 미군이 6·25 때 사용했던 쓰리쿼터였는데 장날이면 이들 차에 정원 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싣다 보니 사고가 잦았다.

환자 중에는 산부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산부인과가 없어 병원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조산원에서 산부를 돌보았다. 그러다 보니 산부 중 출혈로 목숨이 위험할 때가 많았고 이들이 급하게 김 외과로 몰렸다.

김 원장이 경남은행 뒤편에 입원실이 있는 병원을 차린 때가 196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는 건물을 3층으로 지어 1층에서는 환자를 진료하고 2~3층은 입원실로 만들었다. 보조원도 5~6명 더 두어 이들이 환자를 돌보도록 했다.

이정호 원장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 김 원장이 수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 매일 아침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이 시계탑 사거리까지 줄을 섰다”고 회상한다. 당시 김 외과는 환자들이 넘쳐나자 진료 차례를 적은 번호표를 주었는데 번호표 숫자가 매일 200번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늦게 병원에 도착한 환자들은 번호표를 받지 못해 진료를 못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공장에 불어나거나 폭발물이 터지는 바람에 집단으로 병원으로 몰리는 환자가 많았다. 이 무렵 울산에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교통사고 환자도 늘어났다. 이렇게 많은 환자가 한꺼번에 병원에 몰리면 입원실이 부족해 김 원장 집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근에 있었던 대형 식당인 대구장에 환자들을 입원시켜 놓고 진료했다.

환자들이 많다 보니 문제점도 노출됐다. 환자들이 서로 빨리 진료받으려고 싸울 때가 잦았고 특히 교통사고로 입원한 환자들은 사고 차주와 합의하는 과정에서 고성이 오가는 바람에 병원이 늘 시끄러웠다. 당시만 해도 의료보험이 시행되지 않아 차주와 환자들 사이에 논쟁이 잦았고 교통사고 환자 중에는 아예 집에서 석유풍로를 병원에 가져다 놓고 입원실에서 음식을 해 먹는 바람에 화재의 위험도 컸다. 또 교통사고로 환자가 몰리면 경찰이 병원에 들러 사고 경위를 조사하다 보니 병원에는 경찰도 들끓었다.

교통사고 환자 중에는 장시간 입원하다가 차주와 합의가 되지 않으면 돈이 없어 병원비도 내지 않고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도룡씨가 하는 일 중 하나가 병원비를 내지 않은 환자를 찾아다니면서 병원비를 받는 것이었다.

진료 시간이 길어져 김 원장이 과로할 때도 잦았다. 진료는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였지만 공단에서 대형 사고라도 나면 집에도 못 가고 밤새도록 이들을 돌보아야 할 때도 많았다.

일요일에도 진료했다. 김 원장은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처럼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만 매달렸다. 이때는 돈도 많이 벌었다. 병원 수입은 부인 배 여사가 관리했는데 매일 오후 산더미처럼 쌓인 돈을 셀 수 없어 현금이 가득 든 돈 가방을 병원에서 가까운 농협에 맡기면 농협 직원이었던 심재향씨가 다음날 예금 액수가 찍힌 통장을 배 여사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심씨는 현재 대구에서 살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는 과로로 늑막염이 와 한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환자 진료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박점애씨의 회고다.

“그때만 해도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이라 환자 중에는 병원비를 외상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고 또 환자들이 많다 보니 일일이 친절하게 진료를 못해 이를 두고 예의 없이 구는 환자들도 많았지만, 선생님은 짜증을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만취 상태로 병원을 찾아와 진료를 요구하는 환자도 있었는데 선생님은 이때도 저에게 ‘환자를 나무라지 말고 주사를 놓고 약을 주어 보내라’고 했습니다.”

김 원장이 늦게 가진 취미가 골프였다. 1970년대 말 골프를 배웠던 그는 골프에 재미를 붙여 이정호 원장과 함께 경주 골프장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이때도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새벽 시간에만 골프를 쳤다.

그런데 1983년 봄, 김 원장은 골프를 치러 이정호 원장과 함께 경주로 갔으나 골프장을 절반 정도 돌았을 때 머리가 아프다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서울로 갔다. 이때 김 원장이 서울로 간 것은 다음날 외동아들 도수의 대학 입학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가기 전 김 원장은 박점애씨에게 “어제 먹은 음식이 체한 것 같다”면서 “내가 없는 동안 어머니를 잘 보살펴 달라”는 당부했다. 당시 김 원장은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고속버스로 서울로 갔던 그는 버스 안에서도 음식을 토하는 등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가볍게 생각한 그는 아들 입학식에 참석한 후에도 상태가 좋지 않아 친구가 의사로 있던 가톨릭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뇌졸중이었고 골든타임을 넘겨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마스크를 낀 채 울산으로 왔던 그는 5일 후 타계했다. 사망 진단서는 경북의대 후배로 골프 파트너였던 이정호 원장이 발부했다.

김 원장이 타계한 후 병원 건물에는 한동안 강수철 형제가 세 들어 형은 1층에 내과를, 동생은 2층에 산부인과를 차렸다. 동생은 얼마 있지 않아 부산으로 갔다.

김 원장은 생전에 1남 4녀를 두었다. 이중 딸 둘은 김 원장이 타계하기 전 출가했다.

아들 도수는 부친이 타계한 후 부산에서 어머니 배 여사를 모시면서 살았고 큰딸 혜정은 명지대 교수로 학장까지 지냈다.

둘째 순정은 결혼 후 미국으로 갔는데 신랑이 미국에서도 권위 있는 백혈병 의사가 되었다.

셋째 은정은 의사가 되었고 넷째 미정은 변호사에게 시집갔다. 미정의 남편이 개그맨 김형곤의 동생이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부인 배 여사는 김 원장이 돌아간 후에도 부산에 살면서 부산다도회 회장을 지내고 보석감정사 자격증을 따는 등 활달하게 살다가 올해 4월 92세로 영면했다.

개원 때부터 김 원장과 함께 병원 일을 함께했던 김도룡씨는 부인 박정애씨와 함께 김 원장이 돌아간 후 병원 인근에 식당을 차렸다.

“김 원장이 우리를 자식처럼 사랑해 주어 우리 부부도 나중에 김 원장 부부를 부모처럼 모시고 싶었는데 원장님이 일찍 돌아가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식당을 해 보니 당시 병원을 찾았던 환자 중에서 우리 식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김 원장이 오래전 환자들에게 베푼 은혜를 우리가 받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면서 김 원장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명애씨의 얘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도룡씨도 3년 전 갑자기 타계하는 바람에 울산 의료계의 전설적 인물이었던 김 원장의 선행을 전해 줄 인물도 줄어들고 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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