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풍류의 장, 문화재 보호구역 지정뒤 수리마저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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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풍류의 장, 문화재 보호구역 지정뒤 수리마저 어려워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11.2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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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청정은 그동안 반구대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노래해 왔지만, 지금은 반구대의 문화재 보호구역 지정으로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다. 집청정 맞은편 암벽에는 학 그림이 새겨져 있다.

자연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 난 울산 반구대는 볼 것이 많다. 국보인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이 있고 이들을 영상으로 한눈에 볼 수 있는 암각화박물관도 자랑거리다.

집청정은 이런 외형적인 문화유산 외에도 반구대가 갖고 있는 속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집청정에서 살고 있는 최원석(53)씨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가 어떻게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는지와 반구대 곳곳에 숨어 있는 비경을 들을 수 있다.

최씨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 조상들은 반구대를 단순히 눈으로만 보고 즐기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집청정을 건립했던 최신기 어른은 ‘盤龜 十詠’(반구 십영)을 정해 놓고 후손들이 반구대의 참모습을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반구대 초입에 있는 집청정은 언뜻 보기에는 전통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한옥 같아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이 정자는 조선시대 말 학문을 사랑했던 최 어른이 반구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 위해 숙종 39년(1713)에 건립했다. 최 어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던 최진립 장군 증손이다.

▲ 집청정 맞은편 암벽에는 학 그림이 새겨져 있다.
▲ 집청정 맞은편 암벽에는 학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가 이곳에 정자를 세운 때가 반구서원 건립 1년 뒤였다. 이러다 보니 반구서원 유생들이 자주 찾아와 정자는 유생들이 반구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하면서 한시를 짓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정자 맞은편 암벽에는 최 어른의 행적을 보여주는 암각화가 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말 권세가들이 풍류를 즐겼던 금석문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학 그림이다.

반듯이 선 모습으로 머리를 몸통 쪽으로 돌리고 있는 학 그림은 흡사 학이 살아 있는 모습이다. 전국에서도 이처럼 학 전체가 온전히 그림으로 바위에 새겨져 남아 있는 곳이 없다고 한다.

학 그림은 오랫동안 누가 그렸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이 그림 바로 위에 낙관처럼 ‘雲岩主人崔信基’(운암주인최신기)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어 학 그림을 그린 사람이 최 어른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雲岩’(운암)은 최 어른 호다. 학 그림이 있는 산 일대가 최 어른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최 어른 후손의 소유이기 때문에 ‘主人’(주인)이라는 글도 넣었던 것 같다. 흡사 학 그림의 낙관처럼 새겨진 이 글은 오랫동안 흙 속에 묻혀 심지어 최 어른 후손까지도 알지 못했다.

학 그림 왼편에는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잉어 그림도 있다.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는 불교 사학자 문명대 교수가 세상에 알렸다. 그런데 문 교수가 이런 귀중한 문화유산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인물이 최원석씨의 아버지 경환 어른이었다. 경환 어른은 신기 어른의 8대손이다.

1970년 12월 문 교수가 이끌었던 동국대 불교유적조사단이 원효가 주석했던 반고사지를 찾기 위해 반구대에서 처음 들렸던 집이 집청정이었다.

문 교수는 자연히 이 집 주인인 경환 어른에게 불교 유적지가 있는 곳을 물었고, 최 어른이 문 교수를 데려간 곳이 지금도 탑 편이 많이 흩어져 있는 천전리각석 인근 논이었다.

이 무렵 최 어른은 천전리각석 인근을 비롯한 반구대 일대에 논이 많아 매일 아침 논에 물을 대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최 어른이 이날 문 교수를 안내하면서 천전리각석 쪽을 가리키면서 “저쪽에도 옛날 사람들이 바위에 새겨 놓은 그림들이 많다”고 말한 것이 문 교수 일행이 천전리각석을 발견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 무렵 최 어른은 집청정 인근에도 논이 30여 마지기 정도 있어 이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천전리각석에서 집청정까지 나무 홈통을 걸쳐놓고 물을 운반했다.

500m가 훨씬 넘는 이 홈통은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면서 사라졌다. 최씨는 “지금 생각하면 이 홈통이야말로 옛 우리 농촌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인데 아버님이 힘들여 만들었던 이 홈통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반구대암각화는 전천리각석 발견 일 년 뒤 세상에 알려졌다. 반구대암각화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최 어른이 반구대암각화 장소를 문 교수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문 교수는 천전리각석 발견 후 서울로 갔지만 가끔 반구대로 와 최 어른 집에서 숙식했다.

그런데 어느 날 최 어른이 문 교수에게 “대곡천을 건너는 것이 힘들지만 저 아래 바위에도 그림이 많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반구대암각화도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었다.

‘盤龜 十詠’은 최신기 어른이 일일이 구경 후 직접 정했다. 그리고는 바위에 이들 명소의 이름도 직접 새겼다. 최 어른의 이런 작업을 지켜본 학자가 식산 이만부였는데 그는 자신의 문집에 최 어른의 당시 활동을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식산은 조선시대 말 현종 때 서울 명가에서 태어났지만, 조부와 부친이 당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전국을 유람했다.

‘十詠’ 속에는 집청정·비래봉·관어대·완화계·학소대·옥천선동·선유대·포은대·반구서원·향로봉이 들어 있다. 이들 명소에 풍류를 불어 넣은 인물이 제암(霽巖) 최종겸(崔宗謙)이다. 제암은 후일 ‘十詠’을 둘러본 후 이들 명소의 아름다움을 한시로 남겼다.

예로 ‘‘집청정’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뜰에서 뒤섞여 푸르고/ 시원한 바람은 사방에서 부네/ 밤에는 청아한 뜻이 넉넉한데/ 밝은 달은 매화 가지 위로 떠오르네.’

또 ‘‘비래봉(飛來峯)’은 크고 신기하게 서 있는데/ 높은 바위라서 반은 구름 속에 들어있네/ 봉황이 너울너울 춤추는 듯하네/ 개골산에서 날아 왔다고 말하네’라고 써 놓았다.

비래봉은 하늘로 치솟은 바위가 너무 아름다워 조선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림을 그려 지금도 그 그림이 남아 있다.

세상은 풍광이 좋은 집청정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한 권력자가 중간에 사람을 넣어 많은 돈을 줄 테니 정자를 팔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마을 사람들은 정자를 권력자에게 넘기면 마을이 더욱 발전할 수 있다면서 경환 어른에게 팔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는 바람에 최 어른은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최 어른은 이 정자는 돈으로 환산해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거절하면서 이 집을 지켜내었다.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 발견으로 이 지역이 유명 관광지가 되면서 집청정은 또 다른 피해를 보았다. 이전만 해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집청정 앞 좁은 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갔다.

관광객이 반구대를 많이 찾을 때까지만 해도 현 집청정 앞길은 집청정 정원이었다. 정원에는 수령 100여 년을 훨씬 넘는 배롱나무가 7주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들 배롱나무가 모두 길 건너편 대곡천 방둑 위에 있다.

이것은 그동안 집청정 정원이 길이 되면서 생겨난 형상이다. 반구대 일대가 개발되면서 반구대로 들어갈 마땅한 길이 없자 집청정 정원을 잘라 길로 만들더니 나중에는 이렇게 생겨난 길을 여러 번 확장하는 바람에 지금은 집청정이 정원이 없는 건물이 되고 말았다.

옛날 집청정 건물 앞에는 넓은 정원이 있었다. 그런데 정자 앞길로 처음에는 손수레 길이 생기더니 나중에는 택시 길이 만들어지고 최근에는 버스가 통행해야 한다면서 그때마다 길을 확장하는 바람에 정원이 사라졌고 대신 정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대문이 겨우 이 집을 지키고 있다. 대문도 처음에는 정자에 걸맞은 크기로 건립되었지만 길이 확장될 때마다 건물 쪽으로 물러서면서 작게 개조되다 보니 지금은 정자와 언밸런스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최근 반구대 일대가 문화재 보호구역이 되면서 집청정은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이 지역은 문화재 보호구역이 되면서 증개축 허가가 나지 않아 화장실 하나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증개축이 가능하다.

이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는 찻집 하나도 지을 수 없어 넓은 땅을 가졌더라도 주인이 돈벌이는 엄두도 낼 수 없다. 대신 허물어진 건물은 건물주가 고쳐야 해 매년 집수리에 드는 돈이 적지 않다.

최원석씨의 얘기다.

“부친이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이 정자를 지키느라고 고생했듯이 저 역시 집청정을 조상이 남겨 준 문화유산이라 생각하고 지키려고 노력하겠지만 저 다음 세대도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 집을 지키려고 할지 걱정이 됩니다.”

최근 들어 집청정에서는 봄이면 문화 관련 영화제가 열려 많은 울산시민이 모여든다. 그런데 이들 역시 집청정이 언제까지 울산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의 자리를 지켜갈 수 있을지를 걱정하게 된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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