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유림들의 항일운동 ‘장서사건’에 연루돼 옥고 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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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유림들의 항일운동 ‘장서사건’에 연루돼 옥고 치러
  • 서정혜 기자
  • 승인 2022.11.2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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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이우락이 지산서원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던 입암 집은 세월의 흐름 속에 일반 가정집으로 변해 지금은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다. 

울산 울주군 범서읍 입암 마을은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했다. 이 마을은 주민들이 많아 옛날부터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다. 윗마을에서는 파리 장서 사건에 참여했던 가산(可山) 이우락(李宇洛)이 나왔고 아랫마을에는 일제강점기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던 문암(文巖) 손후익(孫厚翼)과 또 여동생 순금(順今)과 함께 항일운동을 열심히 벌였던 학암(學巖) 이관술(李觀述)이 있다.

이중 문암은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로 입암에 사는 동안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인연을 맺어 사돈 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누구보다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펼쳤던 학암과 순금은 해방 후 남로당에서 활동해 역사의 정면에 나서지 못했다.

가산 후손이 가산문집 3권을 최근 내어놓았다.

가산의 삶과 문학 활동을 담은 가산 문집
가산의 삶과 문학 활동을 담은 가산 문집

이 책에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후 격동기를 살았던 가산의 삶과 문필활동이 서술되어 있다. 특히 글 속에는 立巖(선바위)과 문수산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한시도 있어 옛울산의 자연풍광을 자세히 알 수 있다.

가산은 학성이씨 시조 이예(李藝) 17세손으로 고종 때 성균관 생원을 지냈던 동암(東巖) 승혁(升赫)의 증손이다. 1881년 입암에서 태어났던 그는 어린 시절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회당은 항일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1905년 국권피탈 때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오적을 처형해야 된다는 소위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고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고향 칠곡에서 회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 성주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1925년 제2차 유림운동 때는 영남 대표로 활약 했다. 회당은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서당을 연 적이 있다.

가산은 회당 문하에서 문암과 동문수학했다. 이런 인연으로 가산은 경주 강동면 오금리 금호 마을에서 살았던 문암을 입암 마을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문암은 부친 손진수를 비롯 가족 전체가 항일운동을 벌여 일제강점기 강동에서 왜경의 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가산이 왜경의 눈을 피할 수 있도록 문암을 불러들인 마을이 입암이었다.

가산은 입암 마을에 지산서원을 차려 놓고 후학을 가르쳤다. 가세가 넉넉하지 못했던 가산은 주경야독 했지만 형제들이 명석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가산은 5형제였는데 이중 형 난파(蘭坡) 운락(雲洛)과 동생 문음(文陰) 희락(曦洛)이 학문이 높았다.

입암에 입암서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던 난파는 보인계(輔仁契) 서문을 쓸 정도로 학문이 높았는데 지금도 그의 유고집이 남아 있다. 보인계는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울산에서 활동한 문사(文士) 모임으로 매년 봄·가을 회합을 갖고 회원들이 지은 시를 발표했는데 울산대곡박물관은 최근 이들 한시를 번역한 학술자료집을 발간했다.

희락 역시 가학을 이어받아 높은 학문을 쌓고 특히 문장과 시사(詩詞)에 해박해 세인들의 숭앙을 받으면서 43년간 보인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보인계 시첩에 30여 수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문사들이 많다 보니 입암은 농소의 신천 마을과 함께 조선 조 글 읽는 소리가 그치는 날이 없을 정도로 울산에서는 학문이 높았던 마을이었다. 현재 선바위가 서 있는 용암정 아래 마을에 옛날에는 서당이 있었다. 이 서당에서는 매년 시회를 열었는데 이때 입암과 신천 마을 선비가 가장 많이 입상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입암에 있었던 가산 집안의 서원은 인근 지역 교육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지산서원에서 글을 배웠던 후학들은 입암은 물론이고 멀리 두동과 두서 심지어 언양에서도 모여들었다. 후학 수가 윗대부터 숫자를 세면 1000명이 넘었고 가산 때만 해도 3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가산 집안이 범서 일대에서 얼마나 영향력 있는 교육자 집안이었나 하는 것은 범서초등학교 개교에서 알 수 있다. 일제는 그들이 내세우는 황국신민 교육을 펼치기 위해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우리나라 면 단위까지 초등학교를 설립한다.

이에 따라 범서초등학교가 개교한 때가 1927년 11월이었다. 일제는 이때 초등학교 교장을 모두 일인으로 채웠다.

범서초도 개교 때는 교장이 일본인 중강신철(中岡信哲)이었다. 학교는 개교했지만 학생들이 모이지 않아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교장이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범서 일대 학생들이 모두 가산이 가르치는 서원으로 가는 바람에 학생이 입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제로 이 무렵 범서 일대 학부형들은 일인이 교장으로 있는 범서초등학교를 상놈 학교라면서 “상놈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면서 자녀들을 범서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이러자 일인 교장이 가산을 찾아가 범서초등학교 개교를 위해 서원 문을 닫아 달라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범서초등학교는 이런 일이 있은 후 입학생을 채울 수 있었다고 한다.

가산은 그의 문집에 서원 문을 닫아야 하는 비애도 짧게 서술해 놓았다. ‘경학 정승검에게(與鄭敬學承儉)’라는 제목의 글에는 ‘궁핍한 거처에서 무료하여 날마다 마을의 수재들과 함께 즐거워한 지가 10여 년인데 금년 정월에 홀연히 해체하라는 금령이 있어서’라고 당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이 글을 보면 일인 교장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기는 일인교장이 가산을 찾아가 사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문을 닫을 것을 지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외에도 문집에는 가산이 훈장으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느낀 감회를 표현한 글이 있다.

일제강점기 가산의 애국 활동 중 눈에 띄는 것이 ‘파리 장서 사건’ 참여다. 파리 장서 사건은 국내 유림들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한 사건으로 2회에 걸쳐 일어났는데 가산은 1회와 2회 모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1차 유림 사건은 김창숙 등 유림 137명이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 청원서를 보내었던 활동으로 명실상부한 유림 항일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또 일제가 자행한 명성왕후 시해와 조선 주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울산에서 이 운동에 서명한 항일운동가는 유일하게 이규린 옹 한 명뿐이다. 이씨는 학성이씨 이예의 15세손으로 가산의 할아버지뻘이다. 1차 유림사건 때 왜경은 500여 명의 유림을 체포해 조사를 벌였다. 왜경은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문하는 등 악행을 저질러 대부분의 애국지사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다.

당시 웅촌면 석천 마을에 살았던 규린 옹은 김창숙 등 영남의 유림이 연서했던 독립청원서에 64세의 연로한 나이에도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가 대구 형무소에서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2차 유림사건은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군자금 모금을 하다가 발각되었다. 1차 파리장서 사건 후 심산 김창숙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금했는데 이 과정에서 심산이 1926년 경북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이때도 전국에서 엄청난 유림들이 검거되어 재판을 받았다.

가산은 1차 유림사건 때는 물론이고 1926년 일어난 2차 사건 때도 군자금 모금에 앞장서다가 체포되어 일 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런 그의 행적이 밝혀져 1996년 김영삼 정권 때는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1951년 별세해 입암에서 멀지 않은 서사에 묻혔다.

일제강점기 가산이 서원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던 지산서원은 이미 사라졌지만 옛터에는 아직 가산의 증손 재민(在敏)이 새 건물을 지어 살고 있다.

마을을 둘러보면 지형은 그대로지만 이제 농촌이 아니다. 문수산을 쳐다보고 있는 가산의 집터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기역 자 형으로 있었다. 이중 지산서원은 사랑채로 2개의 큰방과 중간에 대청이 있어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가산이 돌아간 후 한 때는 지산서원이 조상을 추모하는 재실이 되었다. 재실 이름은 ‘추원제’로 12세 효순(孝舜)과 13세 지첨(之) 그리고 14세 동암(東巖) 승혁(升赫) 공을 추모하기 위해 1990년 옛 서원을 개축했다. 그러나 추원제도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해 지금은 후손들이 개축해 붉은 벽돌의 살림집이 되어 있다.

울산 향교는 파리장서 사건 100주년인 2019년 울산에서 파리장서 사건에 참여한 인물이 2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파리장서 사건 기념 비석을 세울 계획을 발표했다. 이동필 전교와 엄주환 전 성균관 부관장 그리고 이수원 감사 등 울산 유림이 중심이 되어 추진위까지 조직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업의 진전이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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