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안분지족 실천한 스승 추모하려 제자들이 건립한 활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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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안분지족 실천한 스승 추모하려 제자들이 건립한 활천정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12.1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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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헌 이규현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건립한 활천정 전
▲ 소헌 이규현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건립한 활천정 전

조선시대 울산은 학성이씨를 비롯한 울산박씨, 달성서씨 등 수많은 향족이 정자를 건립해 풍류를 즐겼고 조상 숭배를 위해 재실을 지었다. 또 후학양성을 위해 서당을 세우면서 학문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의 전통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울산 고을에는 두동·두서만 해도 학성이씨 활천정, 김해김씨 모오정, 경주김씨 감은정, 나주정씨 우모정 등 각종 정자가 많다.

이 중에서도 가장 아담하고 고졸한 미를 갖추고 있는 정자가 활천정(活川亭)이다.

활천정은 소헌(小軒) 이규현(李規現)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조선 조 말에 태어났던 소헌은 배우고 익히기를 즐겼고 가르침에 열성을 다했다. 또 평생을 안분지족하면서 살았다.

활천정은 일반 정자처럼 산세가 빼어난 곳에 건립된 것도 아니고 좋은 목재로 화려하게 짓지도 않았다. 대신 이 건물은 아담하면서도 주위 풍광과 어울려 평생 근면·겸손한 자세로 후학 양성에 힘썼던 수헌의 심성을 잘 보여준다.

이 건물의 특징은 이수원 울주문화원 부원장이 집필한 <학성세고>에 잘 나타나 있다.

“정자는 두서면 활천리 339번지에 있다. 정자 앞으로는 복안천이 흐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 또한 조선 선비의 고고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이 정자는 선비의 처소답게 아담하고 정갈하면 고졸한 품격이 어우러져 울산에서 보기 드물게 옛 정자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 소헌 유고집
▲ 소헌 유고집

소헌은 학성이씨 시조 이예(李藝)의 14세로 울주군 농소면 천곡리에서 1855년 출생했다. 소헌의 부친 헌찬(憲燦)은 소헌이 어릴 때 글을 익힐 수 있도록 경주에 있던 성암(惺巖) 최세학(崔世鶴)에게 데리고 갔다.

자식에 대한 헌찬의 공부 열망이 얼마나 컸나 하는 것은 소헌에게 특별히 개인교습을 해 주도록 성암에게 부탁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헌찬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이중 장남인 소헌은 공부를 열심히 해 유학자가 되기를 원했다.

다행히 소헌은 이런 부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해 경주와 울산 일원에서 명성을 얻었다.

소헌이 성암 아래서 높은 학문을 쌓자 부친은 소헌이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오를 것을 원했지만 소헌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두서면 복안리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소헌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던지 소헌이 후학 양성을 위해 서당을 연다는 소문이 나자 울산과 경주에서 150여 명이나 되는 학동이 모여들었다.

소헌은 학문이 뛰어났고 이 학문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잘 가르쳤지만, 노후는 편치 못했던 것 같다. 그의 말년은 최현필(崔賢弼)이 쓴 ‘활천정기’에 잘 나타나 있다.

“소헌은 불행히도 그 맏아들이 부모 곁을 떠났고 그도 오래 앓던 병이 점점 깊어져 마침내 일어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 그의 아우 규완(奎完)이 나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날의 유언을 전하는데 한마디 말로 그것을 기록해 달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유언은 소헌이 타계할 무렵 활천정 편액을 최현필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애초 소헌 주위 사람들은 활천정 편액을 명성이 뛰어난 문필가에게 부탁할 계획으로 누구에게 부탁할지를 소헌에게 물었다.

그러나 소헌은 자신의 삶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 최옹이라면서 그에게 부탁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최옹은 수운 최재우 집안으로 대과에 합격해 벼슬을 했다.

정자가 건립되기 전 눈을 감은 소헌을 아쉬워하는 최옹의 글은 계속된다.

“아! 정자는 완성되었으나 사람은 바쁘게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지난날을 생각하노라니 더욱 소나무 아래의 티끌이 되고 들보위에 걸린 달이 된 감회를 금할 수 없다. 또 그 손자들이 흥성하지 못해 사손인 왕락을 양자로 삼아 온갖 행실에 근신했으니 이로부터 선조의 뜻을 이어가는 책무는 모두 왕락의 일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자식으로 선비가 해야 할 가장 큰 책무가 대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외동아들이 먼저 타계해 대를 이어갈 후손이 없어졌을 때 소헌이 느꼈을 절망감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소헌은 이런 불행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안빈낙도를 실천하면서 살다가 눈을 감았다. ‘사물을 접할 때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그의 호 소헌이 이런 그의 삶을 보여준다.

그가 후학을 위해 복안에 지은 재실 역시 ‘안안재(安安齋)’로 이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안안’은 ‘빈궁하고 현달(顯達) 하는 것이 모두 운명이고 세상에 나가 벼슬을 하느냐 초야에 묻혀 사느냐 하는 것도 때가 있다. 세상에 나가야 할 때 억지로 묻혀 살면 분수에 편안치 못하고 이미 빈궁한 운명을 타고났는데도 억지로 현달을 찾는 것은 분수에 편안한 바가 아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소헌은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는 욕심을 버리고 안분지족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하면서 가르쳤다. 이처럼 높은 학문과 덕행을 실천했던 소헌 집에는 선비 방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빈객을 소홀히 대접해 보내지 않았다.

학문에만 전념했던 그에게 재산이라고는 몇 마지기 밭뿐이었지만 이 밭도 소작을 주어 추수 때면 소작인의 뜻에 따라 소출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마저 문중에 가난한 선비가 있으면 이 소출을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활천정은 그가 돌아가기 한해 전인 1933년 건립에 착수해 이듬해인 1934년 8월에 완공했다. 정자 3칸 중 가운데는 마루이고 동쪽 방은 역열재(亦悅齋), 서쪽 방은 이회암(以會庵)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역열재’는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글로 공부방이다. 서편 ‘이회암’은 ‘以文會友’에서 가져온 글로 친구와 담소하는 방을 말한다.

소헌은 불행히도 이 정자가 완공되는 것을 못 보고 타계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회계를 만들어 매년 음력 3월5일 정자에 모여 스승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다. 제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자 인근 논밭을 구입해 이 논밭에서 나오는 소출로 행사 비용을 마련하고 정자를 보수·관리하는 비용도 이 돈에서 염출했다.

세월은 흘렀지만, 이 논밭은 아직 남아 있어 지금도 재실 옆에는 이 논밭을 소작하면서 정자를 관리·보수하는 관리인이 살고 있다. 정자를 방문하면 먼저 반가이 맞아주는 사람이 이 관리인이다.

소헌은 생전에 <소헌 유집>(小軒 遺集) 3권을 남겼다. 필사본을 책으로 묶은 이 문집 속에는 시와 행장 그리고 묘갈명 등 당시 조선 사회의 풍습을 글로 잘 기술해 놓아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 유집은 현재 소헌의 증손 동필(東苾)이 소장하고 있다.

울산 향교 제25대 전교를 지냈던 동필은 전교 재임 동안 유생을 상대로 유학을 지속적으로 가르쳐 사라져가는 유교 학풍을 울산에서 다시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울러 스스로 전교를 단임으로 물러나 이후 전교들이 모두 단임만 하는 전통을 확립했다.

활천정기(活川亭記) 옆에는 활천정중수기((活川亭重修記)도 있다. 이 글은 풍산 유석우(柳奭佑)가 1987년 쓴 글이다. 유씨는 당대 명필로 노무현 대통령 때 보사부 장관을 지냈던 유시민의 큰아버지다. 이 현판 옆에는 증손 동필이 쓴 중수기도 볼 수 있다.

‘公(공)의 諱(휘)는 奎現 字(규현 자)는 學汝(학여), 號(호)는 小軒(소헌)이시다/ 어려웠던 朝鮮 末 蔚山 泉谷(조선 말 울산 천곡)에서 呱呱聲(고고성)을 울리셨네/ 志學(지학)에 奎龍(규룡)에게 勉學(면학)하시고/ 弱冠(약관)에 慶州 玄洞(경주 현동)으로 移徙(이사)하여 惺巖(성암)에게 私師(사사)하시니/ 學問(학문)의 境地(경지)가 深海(심해) 같도다/ 中年(중년)에 斗西面 伏安(두서면 복안)으로 移住(이주)하시어/ 後學(후학) 가르침에 專念(전념)하셨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平生(평생)을 讀書精進(독서정진)과 筆墨(필묵)을 벗하시고/ 禮儀凡節(예의범절)과 孝行(효행)을 삶의 德目(덕목)삼아 實踐躬行(실천궁행)하시니/ 家門(가문)과 고을의 밝은 등불이 되셨고/ 高邁(고매)하신 人品(인품)과 깊으신 學問境地(학문경지)는/ 文集 三卷(문집 삼권)에 담았으니/ 後孫(후손)의 自尊心(자존심)이요 家門(가문)의 榮光(영광)이도다.

晩年(만년)에 活川亭(활천정)지어 一生 業績(일생 업적) 더욱 빛나도다/ 癸酉年(계유년)에 준비하여 甲戌年 仲秋(갑술년 중추)에 完工(완공)하나/ 그 莊嚴(장엄)한 모습 못 보시고/ 八旬(팔순)의 甲戌 元月(갑술 원월)에 仙(선)하시니/ 哀悼(애도)하는 弟子 知人 人山人海(제자 지인 인산인해) 이루었고/ 後日(후일)에 弟子(제자)들은 以會契(이회계) 만들어서/ 推仰(추앙)하고 追慕(추모)하는 儒生(유생)들이 年年(연연)히 모여들어/ 詩(시)를 읊고 글 지으며 文友(문우)가 되었도다. 후략’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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