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과거로부터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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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과거로부터의 자유
  • 경상일보
  • 승인 2022.12.2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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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 관장

한국인들은 대체로 모호함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타국인들과 달리 명확한 이미지, 분명한 정보, 직선적 언행, 확고한 위치 등 무엇이든 간에 스스로 정리될 수 있는 상태가 인지되어야 안정감을 갖는 것 같다.

이항 대립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해온 한국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좌익이나 우익 어느 한 집단을 명확히 선택하지 않으면 양진영으로부터 다 배척당해왔다. 소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인 김범우는 좌우 이념을 벗어나 민족주의를 표방하자, 우에서는 빨갱이, 좌에서는 반동분자로 치부되며 모두에게 박해를 받는다. 좌우합작을 시도했다가 암살을 당했던 여운형, 분단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독립운동가 김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어느 한 집단에 속해야 주적관계로 혈투를 벌였던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어느 한쪽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역사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목숨이 오가는 생물학적 생존투쟁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도 이항대립의 상대를 만들어내야만 대척점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확립되는 욕망의 정치가 난무하는 사회에 있다. 좌가 존재해야 우가 있고 우가 존재해야 좌가 있다. 무조건적인 반대는 자신을 부상시키는 기회를 만들고 서로의 장점을 찾기보다는 서로의 단점을 찾는다. 조금의 틈이 보이면 여지없이 파고들어가 그 틈을 벌리고 내가 그 틈을 발견했다 과시하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찾는다. 과연 미래의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상생의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많은 사회 참여적 예술가들은 예술이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한국 현대미술의 한 흐름이었던 ‘민중미술’은 이러한 필요에 의해 발현되었다. 우리가 흔히 걸개그림이라 칭하는 이 미술은 주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창작되었던 사회 비판적 사실주의 회화를 일컫는다. 당연히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울산에도 활발한 민중미술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민중미술은 거대한 정치적 이념의 무게에 의해 예술이 가진 미적 감응의 여유를 스스로 상실해 버리곤 했다. 아마도 과거 우리 사회는 이러한 여유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상처받은 사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우리의 사회는 진보했고 사회 참여적 공공예술도 과거의 사회와 이념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민중미술은 절대적 존재의 의미인 사회 정치 예술이 아닌 형상미학의 예술로서 다시금 조망이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포스트 민중미술’은 대중의 동의를 얻어야 그 기능이 배가되는 정치 예술의 시각적 보편성에 함몰되지 않고 예술의 실험적 자유와 함께 인간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아래의 사회를 그려내야 한다. 정치적 발언이 그들 작품의 아우라를 형성하기에 앞서 미적 아우라가 먼저 발현되어야 되는 것이다. 이제 민중의 의미는 예술의 실험적인 창작성과 함께 정치적 이념의 굴레를 벗어난 인간 본연의 가치, 즉 진정 자유로운 한국인을 의미할 것이다.

한국의 미술계는 정치적이든 미학적이든 이념에 의한 구분 짓기의 역사적 굴레에 아직도 갇혀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지금의 21세기, 한국의 사회 참여적 예술이 또 다른 방향성을 모색할 때라는 것이다. 필자가 언제나 주장했듯이 예술은 상호호혜의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는 훌륭한 매개체이며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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