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그래픽 태화강]7천년전 울산 태화강, 굴화 부근까지 해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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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그래픽 태화강]7천년전 울산 태화강, 굴화 부근까지 해안선
  • 이재명 기자
  • 승인 2020.01.30 2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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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협곡’ 古굴화만, 훌륭한 고래잡이 어장이었을 듯
-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 26. 대곡천과 반구대 암각화(중)
 

반구대 암각화는 ‘역사책’
7천년전 태화강 변천과정 유추 가능
고래서식·하상변화 답 찾을 수 있어

고래 뛰놀던 古울산만·굴화만
산으로 둘러싸여 자연 울타리 역할
내해의 수초들 맛보러 몰려왔을 듯
고래 얕은곳으로 좌초·포획 가능성

암각화 고래그림 갈수록 줄어
해안선 태화강 하류쪽으로 옮겨지고
퇴적물에 수심 얕아지자 고래도 줄어
선사인들의 사냥감 육식동물로 변해


반구대암각화는 단순히 고래와 호랑이, 멧돼지 등 동물들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이 암각화는 태화강의 역사를 기술해 놓은 일종의 역사책이다. 태화강에 바다가 어떻게 침투해왔는지, 그리고 고래들이 어떻게 이 곳에서 서식했는지, 나중에는 퇴적물이 쌓이면서 태화강의 하상이 어떻게 높아졌는지 반구대 암각화를 면밀하게 조사하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황상일 교수(경북대학교 지리학과)가 지난 2013년 울산암각화박물관 도록에 발표한 논문 <고울산만 환경변화와 반구대암각화>를 참조하면 7000년 전의 태화강의 모습과 그 변천 과정을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홀로세(Holocene)는 1만 년 전에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는 지질시대로 현세(Recent), 후빙기(Postglacial), 완신세(完新世, 일본)라고도 한다. 이 홀로세는 태화강의 변천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시기다.

최종빙기 이후 올라가기 시작한 기온은 홀로세에는 더욱 상승해 6000년전에는 최고온기를 맞았다. 이에 해면상승도 현저히 진행돼 세계 각지의 해안 저지대에 해진(海進:바닷물이 육지쪽으로 올라옴)이 발생했다. 고고학상으로는 구석기시대가 끝나고 신석기시대로 들어갔다.

◇고래의 천국 고(古)울산만, 고(古)굴화만

7000년전 울산 태화강은 굴화 부근까지 바다였다. 홀로세의 해진(海進)이 태화강까지 삼켜버린 것이다. 해안선은 현재보다 훨씬 더 상류 쪽으로 들어와 굴화 부근까지 전진했다. 울산만의 대조차(조수의 높낮이가 제일 클 때의 만조와 간조의 높이의 차)가 0.6m인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바닷물이 가장 깊이까지 밀려 들어온 곳은 구영리 부근이었다.

임암리, 사연리 등지의 태화강 수위도 지금과 달리 크게 높아져 있었을 것이다. 하상의 퇴적물이 현재보다 현저히 적었으므로 수심도 깊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7000년전 울산 중심부와 굴화, 구영 일대는 큰 파도가 없는 잔잔한 바다였다. 지리학자들은 울산의 굴화 일대를 고(古)굴화만, 성남동·삼산동 일대를 고(古)울산만으로 부르고 있다.

고굴화만과 고울산만은 산으로 둘러싸여 그 자체로 자연 울타리 역할을 했다. 고래들은 방어진과 돗질산 사이의 해협을 통과해 고울산만으로 진입, 외해에서는 맛볼 수 없는 수초를 마음껏 뜯어먹었을 것이다. 또 이들 중 상당수는 태화강 줄기를 따라 사연리까지도 모험을 시도했을 것이다.

▲ 울산 태화강의 변천 과정 (해안선 굴화만→염포만 이동), 좌로부터 6000년전.3000년전.100년전.현재.


◇고울산만의 포경

바다가 구영리까지 들어온 상황에서 고래를 잡는 것은 무척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황상일 교수에 따르면 울산 선사인들은 고굴화만의 좁고 긴 공간을 백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굴화만은 좁은데는 300~500m밖에 되지 않는 협곡이다. 이런 상황에서 태화강 입구 쪽으로 방향을 잡은 거대한 고래들은 큰 몸체 때문에 자유롭게 방향을 바꾸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굴화 협곡은 외해(外海)와는 달리 수심이 얕고 고르지 못해 고래들의 움직임에 제한이 많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고래들은 다른 고래나 인간들에 쫓겨 한쪽 방향으로 달아나다 결국 해변이나 바위에 좌초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황 교수는 “선사인은 지금처럼 먼바다에서 고래를 잡은 것이 아니라 당시로는 바다였을 지금의 울주군 굴화리나 성남동 어귀에서 고래를 사냥했을 것이다. 고래들은 얕은 바다에서 자라는 풍부한 해초를 먹기 위해, 혹은 육식성 고래를 피해 잠시 쉬어가기 위해 종종 거친 바다에서 좁고 긴 내만으로 스스로 들어왔을 것이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말기 외국 포경선이 장생포로 들어오기 전 이 지역 살던 주민들은 옛날의 고래잡이 방식을 증언한다. 이들은 참고래를 잡았는데, 여러 척의 소형배들이 고래를 일정한 곳으로 몰아서 창으로 찔러 잡았다는 것이다. 장생포의 좁고 깊숙한 내만은 고래잡이를 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고굴화만에 대입하면 더 훌륭한 어장이었을 수도 있다.

고울산만이나 고굴화만 사람들은 배를 타고 고래를 얕은 곳으로 쫓아 좌초시키거나 얕은 곳으로 몰아 꼼짝달싹 못하게 해놓고는 작살을 이용해 고래를 잡았을 것이다. 고래잡이는 어쩌면 멧돼지나 사슴 포획보다 더 쉬웠을 것이다.



◇반구대암각화 고래의 후퇴

반구대암각화 선사인의 주거지는 지금의 사연리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인들은 사연리 일원에 살면서 계곡주변 바위에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아마도 사냥의 성공을 기원했거나 사냥 방법의 전수 등이 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반구대암각화에 그려진 고래의 수는 후기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반구대암각화 제작초기 전체그림의 73.7%를 차지하던 고래그림(바다동물 포함)은 후기로 가면서 16.2%로 떨어졌다. 빈 자리는 돼지와 사슴, 호랑이와 같은 육지동물로 채워졌다.

황상일 교수는 암각화 속 고래그림이 제작 초기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줄어드는 현상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울산의 해안환경이 변한 것이 큰 원인일 수 있다. 암각화 제작이 끝난 시기는 해안선이 태화강 하류쪽으로 옮겨진 시기와 비슷하다. 따라서 반구대 인근에 살던 공동체 주거지와 고래잡이 어장 간의 거리는 크게 벌어졌다. 퇴적물 때문에 수심마저 너무 얕아지자 고히가 들어오는 횟수도 극감했을 터이고, 이에 따라 선사인의 생활방식도 주변의 육지동물 사냥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글=이재명 논설위원

사진=반구대갤러리

참조=울산암각화박물관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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