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화첩-울산의 풍경과 삶]치술령서 은을암에 이르는 길, 생사 초월한 그리움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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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화첩-울산의 풍경과 삶]치술령서 은을암에 이르는 길, 생사 초월한 그리움만 남아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3.05.1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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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흐리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숨을 몰아쉬다가 서너 번 걸음을 멈춘다. 연두빛 나뭇잎이 잔물결처럼 일렁인다. 살랑거리던 바람이 산꼭대기에서 와서는 거칠어진다. 울산망부석에서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초록 산등성이가 흐려진다. 안개가 산꼭대기를 휩싼다. 치술령 정상으로 향한다. 치술신모비가 세워진 치술령 표지석에 도착하니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진다. 안개비가 산꼭대기를 둘러싼다. 낙엽과 돌과 길이 비에 젖고 바다가 보인다는 경주망부석이 비를 맞는다. 치술신모가 하늘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듯한 환상에 젖는다. 서둘러 정상에서 내려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비가 그쳤다. 갈맷빛 산등성이가 드러난다. 치술령 꼭대기만이 구름안개 숲이다. 기이한 치술령 풍경을 만난 날이다.



◇치술령과 치술신모의 의미

치술령은 ‘새(솔개)가 사는 높은 산마루(산)’란 뜻이다. 치산은 치술산(령)을 줄인 말이다. 울산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치산서원지가 그 예이다. 치술령과 치술신모는 <삼국유사>에 “박제상이 왜국에서 죽은 뒤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을 향해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신모’가 됐다. 지금도 사당이 있다”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치술신모는 신격화돼 도교와 민간 신앙에서 숭배 대상이 됐다. 조선시대에 와서 치술령은 박제상의 충절과 제상 부인의 절개를 표상하는 산이 됐다. 이런 치술령과 치술신모가 가진 의미를 담은, 으뜸가는 시가 세조 때 경상좌도 병마평사로서 울산에 약 2년간 머문 점필재 김종직의 <치술령>이다.

“치술령 정상에서 일본 땅 바라보니/ 하늘에 닿은 동해 물결, 가이없어라./ 내 님 떠나실 때 손만 흔들어 주시더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조차 끊어졌네./ 소식조차 끊어졌네, 영원한 이별이여/ 죽든지 살든지 언젠가는 만나겠지./ 하늘 보고 울부짖다 망부석이 되었으니/ 열녀 기상 천 년 동안 저 하늘에 푸르리라. 述嶺頭望日本/ 粘天鯨海無涯岸/ 良人去時但搖手/ 生歟死歟音耗斷/ 音耗斷長別離/ 死生寧有相見時/ 呼天便化武昌石/ 烈氣千載干空碧”(송수환 역)

이 시는 박제상보다는 제상 부인이 중심이다. 왜국에서 죽은 제상과의 이별, 언젠가 만나리라 라는 기대와 절망, 제상 부인의 죽음은 그녀를 열녀로 추앙하는 계기가 됐다. 충, 효와 더불어 열(烈)은 삼강의 하나로 유교적 질서를 중시하는 조선시대에 강조한 덕목이다. 여기서 치술신모를 열녀의 화신으로 내세웠다.



◇망부석에서 은을암에 이르는 길

박제상 부인과 관련된 망부석과 은을암은 <울산읍지>(1934년)에 나온다. 망부석은 “치술령 꼭대기에 있다. 신라 눌지왕 2년 박제상이 왜국에서 죽자 그 처 김씨가 슬픔과 원망을 이기지 못해 두 딸을 거느리고 이 산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 몸은 돌로 화하였고, 혼은 새가 되었다”고 기록됐다. 망부석은 박제상 부인의 인격화, 즉 여성이 가진 ‘슬픔과 원망’으로 한을 상징한다. 이처럼 치술신모가 인간화되어 개인의 정서를 드러낸, 대표 시는 정조 때 경주 출신 문신 남경희의 <치술령 신모에게 제사하는 노래>다. 송수환 박사가 발굴, 소개했는데, 수려한 번역으로 시에 담긴 제상 부인의 심회가 절절하게 전달된다.(총 16행 중 5~16행을 인용)

“깊은 바다여, 끝이 없고/ 낭군 그려요, 깊이 탄식하면서/ 따라가고 싶어요, 길이 너무 멀어요/ 흉흉한 파도여, 교룡이 사는 집이라네/ 어두운 비 내리네, 남쪽 바람도 거세네./ 아득히 떠난 배여, 하늘 끝에 갔다네./ 고운 내 얼굴이여, 누구에게 가야 하나요/ 슬프다 삶이여, 이별은 있어야만 하나요/ 여라*를 묶었네요, 하염없이 기다려요./ 임 오실 날이여, 어느 달인가요/ 이 달에 못 오시면, 다음 달엔 오시나요/ 해마다 기다려요, 정녕 오실 날 없는가요. 海水深兮無極/ 思夫君兮太息/ 欲往從之兮路漫漫/ 波濤洶湧兮蛟龍之所宅/ 雨冥冥兮蠻風颯颯/ 杳孤舟兮天之末/ 美余容兮誰適/ 嗟人生兮有別/ 結*女蘿兮延佇/ 君之來兮曷月/ 今月不來兮後月是俟/ 年年歲歲兮竟無歸日” *女蘿(여라): 소나무겨우살이(남편에 딸려있는 아내를 비유).

은을암은 망부석에서 동쪽 10리에 있다. 은을암 위는 국수봉이다. 치술령 망부석에서 은을암에 이르는 길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초혼이 배였다. 부르다가 돌이 되고 새가 되어 삶과 죽음을 초월한 애절한 사랑이 남았다. 사랑은 죽음을 통해 망부석을 낳고 새를 낳았다. 부인은 사랑을 잃고 망부석이 됐고, 사랑을 찾아 새가 되어 날아갔다. 여기서 제상 부인의 혼이 망부석이 됐다든지 새가 되어 은을암으로 바위 구멍으로 들어갔다는 설화는 사랑의 불변성이라기보다는 삶의 덧없음을 사랑으로 극복하고픈, 민중들의 꿈과 소망을 투영한 결과라고 하겠다. 그림=최종국 한국화가·글=문영 시인

※QR코드를 찍으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김은정 인턴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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