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를 벗어나니 잔뜩 비를 문 끄느름한 하늘 아래 펼쳐진 너른 들이 안개에 자우룩이 잠겼다. 언제 저런 풍경을 보았던가 할 정도로 생경한 모습이다. 빠르게 지나온 시간만큼 스쳐 지나는 그러한 광경에서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찾아 끄집어낸 건 논물 질펀한 들녘이다. 비록 유리로 차단된 서로 다른 공간이지만 들녘의 단내는 그때와 다름없다.
하늘빛은 완연하건만 벌써 이울어가는 꽃 대신 알록달록 형형색색 등산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은 쑥물 든 산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간다. 그럴수록 신신한 초록빛 사이로 간간이 드러난 산은 그 자신 자태를 뽐낸다.
가지산은 해발 1240m로 영남을 통틀어 지리산, 가야산 다음으로 높다. 주변엔 1000m 고지 이상의 봉들이 빙 둘러있다. 그렇다 보니 한 개 도시로는 부족한가, 밀양시 산내면, 울주군 상북면, 청도 운문면 등 3개 도가 그 산을 떠받치고 있다.
봉의 높이나 미려함 그럴듯한 내력을 가지고 순위를 정했다면 가지산은 영남알프스 산군 중 가장 높다는 것 빼곤 그다지 이목을 끌만한 산은 아니다. 다만 영남알프스 그 어떤 산보다 높아 겨울 눈과 등산객을 일찍 서둘러 맞는다는 종손 같은 맏형으로서의 존재감은 단연코 으뜸이다.
가지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설악산, 월악산, 월출산, 금정산과 달리 화산암으로 이뤄진 산이다. 재약산, 영축산과 마찬가지로 6000만~7000만년 전 화산폭발로 생긴 화산재로 만들어진 산이란 얘기다. 그래서 화강암으로 이뤄진 건너편 백운산과 같은 미끈한 맛은 없다.
허위허위 길을 잡아 허든거리는 다리를 곧추세워 오르다 보면 귀바위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산을 보게 되는데, 상운산이다. 자그마치 1114m다. 가지산 그늘에 가려서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게 숨어 있는 산이다. 산이 구름에 올라탔는지, 구름이 산에 올라탔는지 모를 상운(上雲)에 대한 해석은 나름이지만 동쪽으로 짙은 산안개가 운문령을 덮었고 서쪽에 낀 산안개는 옅어서 이산 저산 형상을 구분 짓는다.

동쪽의 산무가 하얀 모시옷 같다면 서쪽의 산무는 머리에 무서리를 인 고향 집 외할머니 같다. 동쪽 운문령에서 보드기를 헤쳐 다가오는 안개는 바람에 실려 빠르게 게릴라처럼 올라오고 서쪽의 첩첩산중 팬 골에 찬 안개는 점령군처럼 느리게 산 아래로 쏟아져 내려간다. 홀연홀몰, 몽환에 가까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쌀바위다. 웬만큼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저 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엄장 큰 바위다. 쌀이 나왔다고 해서 미암(米岩)이라 부르기도 하나 시암(矢岩)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언양과 청도 의병들이 이곳에서 화살을 쏘았다고 하여 시암(矢岩)으로 부르기도 한다. 욕심을 경계하라는 교훈적 이야기를 안고 있는 쌀바위엔 이젠 쌀은 나오지 않고 대신 산객의 지친 목을 적실 물이 나온다.
가지산엔 산객들을 위한 휴식처이자 대피소가 두 곳이 있는데 이곳 쌀바위 대피소는 그중 한곳이다. 주인장의 말품을 보건대 이곳에서 50년 넘게 자리를 지킨듯하다. 40년 전 대구 동산의료원 의사와 찍은 사진을 내보이며 지금은 두 명만 살아 있다는 말과 더불어 헛헛한 웃음을 짓는다. 헛헛한 웃음 속에 들려준 말은 왜 저 밑에서 이곳까지 힘들게 와서 죽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마 한참 오래전 이야기일 것 같은데 그가 고개를 가로젓는 것은 올라오면서 수백 번은 더 생각했을 삶과 죽음에서 왜 죽음을 택했느냐는 거다. 바위에서 자살한 시신을 거둔 자들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근무하던 방위들이었다며, ‘그때 방위들 고생했지’ 그 당시 단기사병들을 위로한다.
쌀바위를 옆에서 보니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속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 윗쌀바위에 오르기 전 조그만 빗돌이 눈에 띈다. 1985년 히말출리 북동릉(8848m)을 등정한 울산 출신 이규진을 추모하는 비다.
자연 속 풍화를 고스란히 겪은 침목을 딛고 부드러움이란 전혀 없는 사각사각 절리된 바위를 조심스레 밟고 오르면 정상이다. 태백 구봉산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내달린 낙동정맥은 가지산에서 아우 운문지맥을 오른쪽으로 달리게 하고 자기는 다시 달려 신불산 정족산 천성산 금정산 구봉산 엄광산 아미산 몰운대를 마지막으로 정점을 찍는다. 신불산 아래 부로산의 봉수를 받은 부산 구봉산의 봉수대는 몰운대 앞바다를 감시하는 다대포진 응봉 봉수대에 응하며 외적의 침입을 알렸다. 그래서 가지산을 품은 낙동정맥은 한반도 맥을 굳건히 지킨 ‘애국지맥’이다. 산정의 태극기는 하나 바뀐 것 없이 낙동정맥을 대신하여 눈 없는 깃발로 동해 쪽을 바라본다. 단 한 번도 꼬리를 내린 적 없는 깃발이다.
옛날 청도산악회가 세운 비석 앞이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 보양(寶壤)과 이목(梨木)편에 보면 ‘보양이 황폐해진 절을 일으키고자 북령에 올라 바라보니 여러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바다의 용이 말한 작갑이란 말이 생각나서 절을 세우고 작갑사라 이름하였다. 청태 4년 정유에 운문선사란 액호를 내렸다.(寶壤將興廢寺 而登北嶺望之 有群鵲啄地 乃思海龍鵲岬之言 因名鵲岬寺 以淸泰四年丁酉 賜額曰 雲門禪寺) 여기서 말하는 작(鵲)은 까치며 여러 마리의 까치 떼가 땅을 쪼고 있는 그곳에 지은 절 이름이 작갑사고 작갑사를 품은 작갑산을 이두식으로 나타낸 까치산이 결국 어음 변형을 일으켜 가지산이 되었다는 것이 유래다.
이 밖에 많은 설이 있지만 한가지로 통일된 설 없이 난분분한 것은 그만큼 골도 깊고 산도 높음을 증명하는 산이기 때문이리라.
봉의 높이나 미려함, 그럴듯한 내력을 가지고 순위를 정한 것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옥색치마 주름처럼 울렁출렁 거센 물결을 이루고 솟았다 꺼졌다, 위로 치닫는 가지산 주변의 멋들어짐에 저마다 입꼬리에 문 감탄사를 동시에 터뜨린다. 명산은 이름으로 가 아니라 보는 것으로 정해져야 한다는 걸 이 산을 통해 알았다.
서로 총부리를 겨눈 것이 엊그제임을 잊지 말자고 세운 석남사 들머리 왼편 ‘신불산공비토벌작전기념비’에선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총알이 서로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을 것이고 칠정 중 욕심을 다룬 미암이야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란 의미가 있다지만 극단의 이념에 사로잡혀 화해할 줄 모르는 인간들에게 가지산은 어떤 지혜를 내려줄지 궁금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석남사 송림에 머릴 식힌다.
글·사진=백승휘 소설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