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김승필 ‘호랑무늬딱총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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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김승필 ‘호랑무늬딱총새우’
  • 경상일보
  • 승인 2025.01.2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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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서는 병뚜껑 따는 소리가 들렸지
보증금도 없이 월세도 없이
아흔아홉 번 꼬리를 흔들어
집 밖 위험 신호를 알리지만
발이 푹푹 빠졌지
병정개미처럼 큰 집게발로
지난여름 물난리에 끊긴 다리를 보수 중인데
다시 무너지는 패각
난 집 지을게, 넌 망을 봐
골목길 지나
이 적요한 은신처 앞에
탕, 탕, 총소리를 내며
긴 더듬이로 타설 중인 집
말라비틀어진 붓 하나 눈에 띄는 저녁
온몸이 기억하는 별서(別墅)가
내게는 있었지


공생하며 살아남는 약자들의 생존방식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딱총새우는 큰 집게로 만든 기포를 터뜨려 먹이를 잡는데, 그 소리가 딱총 소리 같아서 딱총새우란 이름이 붙었다.

그중 호랑무늬딱총새우는 지난해 제주 서귀포 섶섬 연안에서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발견된 미기록종이다.

이 새우는 모래 속에 집을 짓고 그 집을 물고기에게 빌려주는 특이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이 시에는 시인이 이들의 습성을 공들여 조사한 흔적이 보인다. 딱총새우의 임대주택은 사실 수시로 보수를 해야 하는 허술한 집이다. 물고기도 월세조차 변변히 못 내는 딱한 형편이긴 마찬가지. 이들은 한쪽이 집을 지을 때 다른 쪽은 망을 보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웅크리고 사는 약자들의 갸륵한 생존방식.

딱총새우의 더듬이에서 빌려온 이미지인 ‘말라비틀어진 붓’은 아마 시인의 직업이나 작업을 암시하는 것일 터.

그래도 문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적요한 은신처’, 한적한 별서가 있어서 자주 손이 가는 문적을 쌓아두고 서권기(書卷氣)를 풍길 수 있다면 그 또한 고관대작의 대저택 못지않을 것이다.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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