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지니아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곳입니다(Virginia is for lovers)’ 이 문구는 미국 동부에 있는 버지니아주에서 관광 홍보를 위해 1969년에 공식 제정한 슬로건이다. 과거 울산의 브랜드 슬로건이 시민을 위한 도시라는 뜻을 지닌 ‘Ulsan For You’였던 것이나, ‘도약하는 도시’라는 뜻으로 2017년 7월부터 쓰고 있는 ‘The Rising City’처럼, 시정(市政) 차원에서 다른 곳과 차별되는 자랑거리를 강조하는 것이 지방자치단체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임을 생각하면, ‘연인들을 위한 곳’이라는 문구는 지은이가 정부 부처인 것이 언뜻 떠오르지 않을 만큼 서정적이고 감성적이다.
그런데 이 낭만적인 문구가 제정되기 불과 2년 전인 1967년 6월12일, 버지니아 주정부는 많은 미국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판결의 당사자가 된다. 미국 연방대법원 위헌법률 심판사건인 러빙 대 버지니아 사건 판결(Loving v. Virginia, 388 U.S. 1)이 그것이다. 배경지식 없이 처음 이 판결문을 접하는 이들은 사건명에 적혀있는 ‘Loving’이 법원에 심판을 청구한 신청인 리처드, 밀드레드 러빙 부부를 가리킨다는 걸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법원이 확인한 헌법적 가치가 다름 아닌 당사자의 이름 그대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이해는 놀라움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버지니아주 센트럴 포인트에 살고 있었던 리처드 러빙이라는 청년이 밀드레드 지터라는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 1958년 밀드레드는 리처드의 아기를 갖게 되었고, 두 사람은 버지니아주가 아닌 워싱턴 D.C.에 가서 혼인신고를 한 후 신혼 보금자리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몇 주 뒤, 버지니아주 경찰이 두 사람이 잠들어 있는 침실을 급습한다. 버지니아주에서는 백인과 유색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내용의 인종보전법(Racial Integrity Act)이 1924년부터 시행되고 있었는데, 남편인 리처드는 백인이었고, 아내인 밀드레드는 인디언-흑인 혼혈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법상 이들의 결혼은 무효일 뿐 아니라, 징역 1년에서 5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중대 범죄였다.
체포 당시 밀드레드는 자신들의 침실 벽에 걸어놓은 혼인관계증명서를 가리키며 저항하였지만, 경찰은 다른 주정부가 발행한 혼인증서는 버지니아주에서는 무효라며 이들을 구속했다. 일 년 뒤, 이들 부부는 기소되었고, 둘의 결혼이 ‘버지니아주의 평화와 존엄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집행유예 상태로 25년간 주에서 추방된다.
판결 이후 고향에 남겨진 가족도 친구도 만나러 갈 수 없었던 이들 부부는, 1963년 인권 단체인 ACLU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에게 내려진 형사 판결이 위헌 무효임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한다. 버지니아주 지방법원과 대법원은 모두 ‘인종이 섞이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님’을 이유로 이들의 청구를 기각했으나, 부부는 포기하지 않고 연방대법원에 상고한다. 그리고 소를 제기한 날로부터 4년 뒤, 얼 워런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9인은 만장일치로, 부부를 처벌한 버지니아주법이 연방수정헌법 제14조에서 보장하는 평등권과 적법절차 원칙에 반하는 위헌임을 선고하고, 따라서 러빙 부부에 대한 유죄 판결도 무효임을 확정한다.
연방대법원의 위 판결로 버지니아주를 포함한 16개 주에서 시행되던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anti-miscegenation law)은 그 효력을 상실했으며, 백인과 백인이 아닌 배우자가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는 일은 더 이상 불법이 아니게 되었다. 인종차별이 법의 외피를 입고 공공연하게 연인과 가족을 갈라놓고 처벌하던 시대는 그렇게 끝이 났다. 2020년 현재 미국 내 인종 간 결혼 비율은 전체의 11%에 이른다.
리처드와 밀드레드 러빙 부부의 이야기는 이후 다큐멘터리와 영화로 만들어졌고, 2025년에는 오페라로도 만들어져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서 다음 달 첫 공연을 앞두고 있다. 짧은 봄이 끝나기 전, 사랑하는 이와 영화 한 편을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이준희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