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흐의 ‘The Starry Night(별이 빛나는 밤), 1889’를 볼 때만 해도 일행에게 꽤나 친절했으니까, 내가 처음부터 불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비집고 들어온 관람객 틈을 다시 비집고 들어가 그림 앞에 섰다. 소용돌이 치는 하늘, 언덕 위 조용히 잠든 마을, 그 위로 솟은 사이프러스 나무. 더해서 고흐의 거친 붓질, 바이올렛과 블루의 색 조합까지 친절하게 일행에게 설명했다. 아니, 처음부터 설명이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들은 그림을 읽었고, 그림이 그들을 받아주었다. 그들의 마음은 무언가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걸 ‘감동’이라고 부른다.
그 감동을 안고 우리는 아래층 현대미술관으로 서둘렀다. 그 많던 관람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말없이 둘러보다 자전거 바퀴 앞에 멈춘다. 주방 의자에 자전거 바퀴 하나, 그것이 전부다. 마르셀 뒤샹의 ‘Bicycle Wheel(자전거 바퀴), 1913’이다. 심지어 복제판이다. 한 사람이 묻는다. “바퀴 하나 놓은 게 이게 예술이야?”라고. 다른 사람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조용히 외친다. 이제 모두 나를 쳐다본다.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들은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일행 중 한 사람이 말 없는 나를 대신해 다시 짜증스럽게 묻는다. “그래서 도대체 이 작품은 무엇을 나타내는 건데요?” 현대미술은 관람객에게 ‘질문’을 요구한다.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란 책이 있다. 아득한 옛날 우주에서 두 번째로 똑똑한 컴퓨터 ‘깊은생각’에게 사람들은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컴퓨터는 750만년 동안 연산한 뒤 답을 내놓는다. 그 답은 ‘42’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컴퓨터는 말한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질문할 컴퓨터를 만들고, 그 컴퓨터가 ‘지구’이다. 질문을 찾기 위한 컴퓨터는 연산을 한다. 그리고 어떤 질문을 찾았을까?
현대미술은 그렇게 우리를 질문 앞에 세운다. 예술은 우리의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관한 질문이다. 누군가는 정답이 42이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은 누군가가 어떻게 질문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고흐의 별빛 아래에서, 마르셀 뒤샹의 바퀴 앞에서, 혹은 눈앞의 어떤 낯선 작품 앞에서 당신은 멈추어 선다. 말없이, 그러나 분명히 무언가를 느끼며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예술이 당신에게 물을 것이다. “도대체 당신은 뭔가요?”라고. 그 물음은 당신의 기억, 당신의 경험, 당신의 존재 전체를 향한 질문이다. 예술은 그렇게 나를 질문하게 만들고, 질문은 나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물음이 바로 나라는 존재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장훈화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