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전기 없는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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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전기 없는 일상
  • 경상일보
  • 승인 2025.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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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명호 한국동서발전 사장

지난달 28일 낮,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의 신호등이 일제히 꺼졌다. 차량들이 교차로마다 엉켜 섰고, 경적 소리가 도심을 가득 메웠다. 전광판이 꺼지고 지하철 운행도 중단됐다. 바르셀로나의 슈퍼마켓에서는 카드 단말기 결제가 막히고, 포르투갈 리스본에서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시민들의 구조 요청이 잇따랐다. 스마트폰 데이터와 와이파이가 끊기면서 일부 한국인 관광객은 예약한 숙소로 이동하지 못한 채 공항에서 밤을 지새웠다.

한순간의 정전이 도시 전체 기능을 마비시키고, 사람들의 일상을 완전히 멈춰 세웠다. 그만큼 우리 삶이 전기에 깊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엔 스마트폰 알람으로 잠을 깨고, 전기포트로 커피를 내린다. 사무실의 조명과 컴퓨터, 프린터까지 모든 업무가 전기로 움직인다. 점심엔 키오스크로 식사를 주문하고, 퇴근 후에는 전자레인지로 식사를 데우며 스마트폰으로 콘텐츠를 소비한다.

20세기 초, 조명과 전동기 보급을 통한 ‘1차 전기화’는 산업화를 견인했고, 이후 전자기기와 IT 인프라 확산으로 전기는 일상과 업무 전반에 필수가 됐다. 현재는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교통·난방·산업공정 등 화석연료 기반 영역을 전기로 대체하는 ‘3차 전기화’가 진행 중이다. 쉽게 말해, 가정의 가스레인지를 전기 인덕션으로 바꾸는 것처럼 최종 에너지원을 전기로 전환하는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정전 사태를 결코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현지에서는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재생에너지 과잉공급에 따른 전력망의 불안정성, 특히 관성부족을 지목한다. 스페인은 연간 전력의 4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한다. 대정전이 발생한 한낮, 전력 소비량의 60%를 담당하던 태양광 발전에 갑작스러운 발전량 손실이 생기자, 연쇄적으로 다른 발전설비들도 전력망에서 이탈하면서 공급과 소비의 균형이 무너졌다. 결국 인접국 프랑스에서 전력 연결을 긴급 차단하자 순식간에 전력 생산량의 60%(15GW)가 사라졌다.

기존 화력발전소는 터빈을 회전시켜 전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사고 발생 시에도 일정 시간 관성으로 출력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 태양광과 풍력은 ‘인버터’라는 전력변환장치를 통해 전기를 공급한다. 사고가 나면 출력이 즉시 ‘0’으로 떨어져 전력망 안정화를 위한 여유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다. 이 구조적 차이가 시스템 불안정의 핵심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번 대정전은 재생에너지 전환 속도에 비해 계통 유연성과 보호체계가 미비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불가피하다면, 전력망 안정성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 특히 외부 전력망과 연결되지 않는 우리나라는 정전 시 자력 대응이 필수다. 이를 위해 전력 시스템을 재점검하고, 실질적 대응 역량을 강화해야만 한다.

첫째는 예비력 확보다. 전력 수요 급증이나 발전 불안정 상황에 대비해 즉시 가동가능한 예비전력을 확보해야 한다. 2023년 스웨덴은 유휴 가스발전소 매각을 철회하고 해체 설비를 재가동했으며, 독일도 석탄발전소 폐쇄를 연기했다. 우리 역시 기존 화력발전소 등 즉시 투입가능한 예비전력을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관리해야 한다. 울산 노후 가스발전소는 비상시 계통 안정화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잠재력이 큰 만큼 한국형 가스터빈 도입이나 수소 혼소발전소로의 전환 등 활용 방안에 대한 신속한 정책적 판단이 요구된다.

둘째는 예측력 강화다. 재생에너지는 날씨나 시간대에 따라 출력이 급변하는 간헐성이 있어, 수요·공급의 불균형이 예고 없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 보완하려면 정확한 수급 예측 역량을 갖추는 것이 관건이다. 한국동서발전은 예측 기술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인공지능을 활용한 자체 통합발전소(VPP)를 구축하고 재생에너지 입찰 시범제도에도 참여하며 실효성을 검증하고 있다.

셋째는 유연성 개선이다. 스페인 대정전 사례에서 보듯이, 재생에너지의 급격한 출력감소는 계통 안정성을 흔들어 광범위한 피해를 발생시킨다.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수요관리 기술 등을 활용해 유연성을 뒷받침해야만 한다. 우리 한국동서발전 또한 전기차 충전인프라 등 다양한 에너지저장장치를 활용한 수요관리 사업을 적극 확대하며 계통 유연성 확보에 기여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의 성패는 단순한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확대에만 있지 않다. 불확실한 상황에도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유지할 수 있는 계통 운용 능력, 그리고 유연하고 회복력 있는 전력 인프라를 갖추는 것이 지속가능한 에너지 미래의 핵심이 될 것이다.

권명호 한국동서발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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