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생각]사람이 먼저라던 정부사업의 열정페이
상태바
[이런생각]사람이 먼저라던 정부사업의 열정페이
  • 경상일보
  • 승인 2022.02.10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승진 울산민관협치지원센터 마을혁신연구소장

설 연휴를 기점으로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울산을 떠났었다. 살던 집도 내놨다. 작년에 기반을 잡았던 울주군 서생면 주민조직을 중심으로 올해 본격적인 마을사업을 추진하면서 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지금 쏟아져 나오는 정부와 지자체 공모사업으로는 마을활동가들을 찾고 성장시킬 수 없다. 활동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소모되고 소진될 뿐이다.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안도 해법도 없다.

이런 문제를 감수하며 심사를 통과해도 증빙서류에 치여 목적사업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 행정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속칭 영수증 풀칠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공모사업을 내는 쪽은 이런 호소에 “남의 돈 쓰는 게 쉽나요?”라고 응대한다. 그러면 물어보자. “남의 몸 쓰는 건 쉬운가 보죠?”

이 구조는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다. 해묵은 문제다. 정부 공무원들 생각에 따라 이른바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노동착취 구조를 만든다. 이 지침을 지자체 공무원들이 받아서 다시 지역 전문가들을 통해 심사하고 열정페이를 강요한다. 공모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노동가치는 제로다. 그리고 마을활동가니 사회혁신가니 하나마나한 꼬리표를 붙여 고혈을 짜낸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공적 노동과 수고로움에 대한 대가에 박하다.

예를 들어보자. 작년 연말에 ‘2022년 주민생활현장의 공공서비스 연계 강화 사업 공모계획’이 나왔다. 행정안전부 사업이다. 공공기관별로 지역 내 공공서비스를 분산해서 지원하고 있으니 주민불편을 초래하고, 행정의 문제해결력이 저하된다는 배경이 깔려 있다. 분절화 된 사업별 서비스의 한계를 극복하고, 복합적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공과 민간의 다양한 주체들의 연계·협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의 욕구 충족과 지역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주민생활 현장의 공공서비스 간 연계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추진 방향도 그럴 듯하다. 고령화와 생산인구 유출이 심각하게 나타나는 마을에서 어촌계 건물을 손 본 후 마을복지 거점을 준비하고 있던 내겐 너무나 반가운 사업이었다. 문제는 사업내용에서 나타났다. 유형별로 편차는 있지만 이 사업은 최대 1억5000만 원까지 지원한다. 당연히 인건비는 배제하고 있다. 활동 공간 조성에 관한 비용도 언급이 없다. 그냥 사람들 모아서 프로그램 열심히 돌리라는 말이다.

담당 주무관과 통화를 하다가 더 황당한 말을 들었다. 이 사업에 참여하려면 유사 실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가의 기능과 공공서비스 전달체계가 미치지 못해서 소외받고 있는 어촌주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는데 실적을 요구한다. 접근성이 낮은 농산어촌 지역은 가산점을 줘도 모자랄 판에 실적이라니 기가 찼다. 사람이 먼저라던 정부 공모사업의 현실이다. 이대로라면 누가 되던 다음 정부에도 기대할 게 없어 보인다.

이승진 울산민관협치지원센터 마을혁신연구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 곳곳 버려진 차량에 예산·행정 낭비
  • [지역민도 찾지 않는 울산의 역사·문화명소]울산 유일 보물 지정 불상인데…
  • 확 풀린 GB규제…울산 수혜 기대감
  • 울산 앞바다 ‘가자미·아귀’ 다 어디갔나
  • 축제 줄잇는 울산…가정의 달 5월 가족단위 체험행사 다채
  • [기고]울산의 랜드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