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배려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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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배려의 재구성
  • 경상일보
  • 승인 2022.02.2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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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해 시인·울산문인협회장

얼마 전 모TV 뉴스에 방영된 시청자 제보 영상 중,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홱홱 지나가는 차량들을 피해 하염없이 서 있던 사람에게 승용차 운전자가 차를 멈추고 먼저 가라는 신호를 주니 그 보행자가 고맙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건너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말 없는 배려와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상호 작용하여 깊은 유대감을 형성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의 만남이 뜸하여 본의 아닌 오해와 억측이 발생하고 인간관계가 건조해진 면이 없지 않은 상황에서, 이 영상은 사소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미담의 한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종종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필자는 작년 연말, 버스를 탔던 날의 일을 잊지 못한다. 한 정류장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승객이 코를 손수건으로 가린 채 차를 타더니 눈치를 보며 허겁지겁 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버스 내에는 승객들이 많지 않았지만 나는 혹시 운전기사가 보지 않았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보통, 승객이 턱스크라도 하고 있으면 기사가 룸미러를 통해 발견하고 ‘마스크 바로 쓰라’고 소리치는 것이 일반적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곧 아니나 다를까, 기사의 둔탁한 목소리가 차내 공기를 뚫고 묵직하게 전해졌다. “사장님!”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소스라치게 놀란 듯 그 승객의 몸이 움찔했을 때 기사가 투박한 손을 내밀며 “여기, 마스크 쓰세요.” 1회용 마스크 하나가 승객의 떨리는 손으로 전달되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순식간에 일어난, 숨 막힐 듯 놀라운 광경이었다.

방역 당국의 지침이나 운수회사의 방침에 따라 대중교통 이용시에 마스크 착용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또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승객에게 기사가 승차 거부를 하는 것은 정당한 대처법이다. 그러나 소설 같은 상상을 해 본다면, 그 승객은 누군가와의 약속이나 행사 참석, 또는 자신이 계획한 일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외출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버스를 타기 바로 전 자신에게 마스크가 없음을 깨닫고 얼마나 당황했을 것인가. 집은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고 날씨가 너무 추우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마스크를 챙겨오는 것이 엄청 불편하고 번거로웠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행사도 끝나게 되고 약속도 지키지 못하게 되어 그에게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그 복잡한 상상을 한꺼번에 해결해 준, 눈물겨운 배려의 현장을 필자는 목격한 것이다. 교통카드가 잘못되어 카드단말기에서 나오는 기계음이 계속 거부 의사를 표할 때, 애처롭게 바라보던 다른 승객이 승차비를 내주는 것은 보았으나 운전기사가 승객에게 마스크를 제공하는 것은 처음 접한 일이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버스를 타는 것이 방역수칙에 어긋나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 상황과 처지를 감안할 때 기계와 달리 감성이 작용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모든 것의 시시비비를 법규에 의거하여 단호하게 재단하지 못할 때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버스 기사도 때로는 승객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승객이나 운전기사의 일련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물리적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규칙의 준수와 위반의 경계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적인 유대와 배려는 지극히 유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 그날로부터 머지않은 날 그 승객은 한 다발의 마스크를 챙겨 들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마운 버스에 다시 올라 기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까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누구에게나 입장은 다 있다. ‘배려’는 자신의 입장을 잠시 접어두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자세, 곧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 그를 ‘이해’하려는 태세(態勢)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이해’는 더 낮은(under) 자리에 서서(stand)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태도의 발로이다.

권영해 시인·울산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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