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삼건의 미래도시(3)]조선의 500년 미래 도시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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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삼건의 미래도시(3)]조선의 500년 미래 도시 설계
  • 경상일보
  • 승인 2022.03.2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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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삼선 울산도시공사사장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KBS 주말드라마 ‘태종 이방원’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의 배다른 형제인 세자 방석 등이 죽임을 당하고 정종이 즉위하더니, 2차 왕자의 난이 정리되고 정종이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드라마 제목 그대로 ‘태종 이방원’이 탄생했다. 그런데, 조선이라는 신생 왕국의 틀을 잡은 사람은 태종이지만, 그 설계를 맡았던 인물은 정도전이다. 500년 왕조의 설계도를 그려냈던 정도전은 태종이 왕이 되기 2년 전인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의 수하에게 죽임을 당했다.

정도전은 한양천도를 계획하고 실행을 주도했는데, 도성의 기본 설계는 물론, 성문의 이름과 경복궁의 전각 이름도 모두 그가 지었다. 예를 들면 성리학의 오상(五常), 즉 오륜을 의미하는 인의예지신을 붙여서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보신각 등의 이름을 지었다. 도성과 관련된 여러 제도는 ‘주례’(周禮) 동관 고공기에서 따왔는데, 그중 ‘좌묘우사’(左廟右社)제도에 따라 왕이 남으로 보고 앉은 경복궁의 왼쪽 즉, 동쪽에 종묘가 배치되고,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배치했다.

춘추전국시대보다 앞서는 고대 중국의 제도를 재해석해서 15세기 조선에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정도전과 같은 사대부가 주자학 신봉자였기 때문이고, 역시 주자학을 배운 이방원같은 관료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나라의 제도를 이상적인 것으로 본 이들이 만든 조선과 조선의 도시는 1895년 을미년 지방제도 개혁까지 그 제도적 틀이 유지되었고, 물리적 구조물은 ‘지정문화재’가 되어서 지금도 우리 생활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500년을 이어간 조선시대 도시의 미래는 주자학에 경도된 당시의 개혁적 지도층의 이념과 사상을 토대로 14세기 말에 만들어졌다. 한양 도성과 도성을 축소 카피한 전국의 읍치는 500년간 근본적인 변화없이 기본 틀이 유지됐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도시 틀이 백성들 사이에 빠르게 정착돼 뿌리내릴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고려 말 왜구 침략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사> 등의 기록을 보면 14세기 중엽 이후 울산지역은 물론 삼남지방 전체가 왜구 침탈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백성들이 왜구에 쫓겨 피난을 가다보니 도시는 비게 되고, 생업활동이 무너지니 나라의 재정도 고갈됐다.

그 타개책으로 고려 정부는 직접 왜구를 물리치는 한편 백성들의 정착을 돕는 사업을 진행했다. 몽고 간섭 탓에 무너져 방치된 각 고을의 치소성을 비롯한 산성을 고쳐 쌓아서 백성들의 재정착을 지원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고려 말 왜구 침탈로 부자도시 울주성이 황폐해진 모습과 고을 수령이 이를 수리한 기록이 있다. 그 다음 단계에서 조선 스타일의 읍치를 새로 만들고 성곽을 축조하는 일이 진행됐다.

울산의 경우 새로 만든 조선 스타일의 신도시는 지금의 중구 경상좌병영성이다. 태종 말년인 1415년에 쌓기 시작해서 1417년 완성됐고, 동시에 울산에 경상좌병영이 설치됐다. 1426년까지는 읍성과 병영성이라는 이질적인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다가 이후 1437년까지 10년간 진정한 울산읍성 역할을 했지만, 후에 다시 병영으로 바뀌어 1895년까지 존속했다. 병영 재설치 후 40년이 지난 1477년에는 지금의 중구 북정동, 교동, 옥교동, 성남동 일원에 새 읍성이 축성되었지만 이마저도 120년 만인 1597년에 왜군이 허물어 버렸다. 성벽은 다시 쌓지 못했지만 읍치는 그대로 남아서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관아가 즐비했고, 5일마다 장이 열리는 조선스타일의 도시로 자리 잡았다.

아득히 먼 15세기 초에 축성한 읍성과 읍치가 500년 이상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의 안전을 일상화했고, 새 시대의 가치관을 물리적인 시설로 잘 바꿨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사회가 왜란과 호란이라는 양대 전란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도시 시설이라는 공간과 장소가 이념과 체제를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그 핵심 시설 가운데 문묘와 사직단 같은 백성들의 정신을 지배한 제사시설이 있다. 이것이 500년 조선 도시의 미래를 결정지은 핵심요소다.

한삼선 울산도시공사사장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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