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이야기는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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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이야기는 가까이에 있다
  • 경상일보
  • 승인 2022.03.2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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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정 온남초 교사

친구에게서 그림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책은 한 권이지만 이야기 두 편이 책의 양쪽 표지로부터 시작되어 가운데에서 만나도록 만들어진 독특한 책이다. 뒤표지가 따로 없어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다.

첫 번째 이야기의 제목은 <암란의 버스>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암란은 가족이 다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열 살 때부터 일을 시작했고, 8년 동안 모은 돈으로 버스를 구입했다. 정해진 노선은 따로 없이 모인 사람들의 행선지에 따라 버스를 몰았다. 암란은 그 버스가 언젠가 자신을 가족과 함께 할 집으로 안내해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버스를 운전한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내전이 일어난다. 반군이 암란을 강제로 징집하려 하자, 암란은 버스를 팔고 비행기 표를 사서 나라를 떠난다. 그는 운명의 버스를 몰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길을 잃고 만다.

반대편에서 시작하는 또 다른 이야기는 <야스민의 나라>다. ‘행복한 아라비아’라 불리는 나라에서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있던 야스민은 어느 날 밤 폭발음과 불빛에 놀라 잠에서 깬다. 천둥인 줄 알았던 그 소리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고, 뉴스에서 사흘이면 끝날 거라고 했던 공습은 몇 년째 이어졌다. 모든 공공시설이 문을 닫고, 전기와 수도, 난방이 끊겼다. 전쟁으로 인해 평화가 사라진 나라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던 야스민은 오빠와 형부를 따라 고향을 떠나 먼 나라로 날아간다. 낯선 땅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기 위해 난민 신청을 하지만, 그것은 불행을 증명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암란과 야스민의 이야기는 책의 한 가운데에서 만난다. 예멘에서 각자의 여정을 시작해 먼 길을 거쳐 한국에서 만난 두 사람의 모습과 닮았다. 그들은 지난 2018년 제주에 정착한 예멘 난민이다. 각각의 이야기 끝에서 암란과 야스민은 난민의 정의를 한 목소리로 말한다. “첫째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고, 둘째는 그 어려움을 말하지 못하거나 외면당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덧붙인다. “그래서 나는 난민입니다.”

지난 해 카불 공항에서 온 힘을 다해 비행기 날개를 잡고 고향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봤고, 곧이어 탈레반이 정권을 잡자 학교에 갈 수 없게 된 소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아기를 태울 수 있도록 폴란드 국경의 기차역에 기부된 유아차의 행렬과, 피난민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마중 나온 베를린 역의 많은 사람들을 보며 감동을 받기도 했다.

어떤 이름으로 왔든 그들의 삶에는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어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들이 10년 안팎의 짧은 삶에서 겪어선 안 될 큰일을 겪고도 낯선 땅에서 살아 있음이 놀랍고 감사하다. 새로운 나라에서 등교를 시작한 어린이들의 학교생활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민정 온남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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