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27)]노년의 진정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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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27)]노년의 진정한 친구
  • 경상일보
  • 승인 2022.04.0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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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철학박사·칼럼니스트

헤밍웨이는 50대 중반에 그의 마지막 소설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다. 쿠바의 작은 어촌에서 지낸 본인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 이 글은 한 고독하고 노쇠한 노인이 자신에게 남은 얼마간의 행운과 불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노쇠해 가는 생명의 마지막 힘을 자신의 소박한 희망을 위해 쇠진하려는 의지는 예술적인 감동을 넘어서 삶의 경건함을 보여준다. 흔히 이 소설의 핵심은 어부 산티아고의 불굴의 의지와 결코 절망하지 않는 삶의 태도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이 들어 다시 읽어 보니 다른 것이 보였다. 쇠잔해 가는 노인에게 필요한 친구는 자연이라는 사실을 헤밍웨이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그것이다. 주인공 산티아고는 훌륭한 어부이자 노인이다. 그래서 그는 바다에서 가장 깊은 자유를 느끼고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지혜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에게는 바다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진정한 친구이다. 산티아고에게 바다 이외의 친구는 어린 소년 마놀린이 유일하다. 그들의 관계도 바다가 이어주고 있다.

산티아고 노인은 85일 만에 잡은 청새치를 작살로 때리면서도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하기야 저 고기도 내 친구이긴 하지. 저런 고기는 여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하지만 나는 저 놈을 죽여야 해. 하지만 별들은 죽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지 뭐야.’ 바닷가에서 살기 위해서 진정한 형제들을 죽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죽어가는 고기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밤바다에서 힘든 시간을 같이 보내는 별도 친구지만 어부이기 때문에 죽여야 하는 고기가 진정한 친구인 것이다. 살아가면서 생명에 필요한 절실함을 주고받는 대상이라면 모두 친구라는 깨달음을 노인 산티아고를 통해서 헤밍웨이는 이야기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노인이 되면 누구나 물이나 산과 같은 자연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가까이 하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티아고와 같은 깊은 교감에 이르지는 못하고 살아간다. 산티아고가 바다에서 느끼는 진정한 우정을 평생 얻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심한 자연보다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정서적 온기를 느끼려고 노력한다. 막걸리라도 한잔 먹은 후 아무 부담 없이 전화 속의 음성으로나마 닿을 수 있는 그런 친구를 상상하고 바라게 된다. 그러나 사회가 만들어내는 이해관계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노년이 되면 따뜻한 정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우정의 힘도 함께 퇴락한다. 정서적인 것 보다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훨씬 강한 결속력을 발휘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년에 이르면 골프와 같은 사교적인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를 최고로 여긴다. 골프는 경제적인 여유도 있어야 하지만 약간의 친밀감이 사전에 형성되어 있어야 가능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에 서너 번씩 골프 회동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노년 생활에서 최고의 자랑거리요 보람이다. 이런 관계가 노년에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친밀감이라 믿는 것이다. 젊은 날에는 참교육을 위해서 해직도 불사하고 사회정의를 위해서 혈맹을 다짐한 사람들도 은퇴 후에는 골프 모임이 친목의 유일한 수단이 되는 것을 가까이서 보았다. 젊은 시절에는 정서적 교감이 넘치던 친구간의 술자리도 노년이 되면 망설임이 앞선다. 언어로 재생되는 과거의 감흥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술자리의 횟수도 줄어들지만 만나는 대상도 줄어든다.

결국 우리는 노년의 진정한 우정은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자연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한다. 문학 작품 속에 남아 있는 수많은 귀거래사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처럼 자연 속에서 진정한 친구를 얻고 삶과 죽음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면 노년이 그리 쓸모없는 시간만은 아닐 것이다. 헤밍웨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산티아고 노인을 창조한 헤밍웨이가 62세에 스스로 권총을 쏜 것을 보면 그도 현실 속에서 노년의 진정한 친구를 찾아내지는 못한 것 같다.

김상곤 철학박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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