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잡힌 원형지구에 산다는 건 중세이후 큰 축복이다. 문·사·철로 수렴되는 인문정신은 무지로부터의 공포를 벗어나게 한 백신이다. 2년여 코로나로 삶이 고달프고 사고가 억제되어 비록, 좋은 시절은 아니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 사고로 사람과 사물, 사건을 대하는 외눈박이 거인들이 너무 많다. 지위 고하를 떠나 듣지 않고 말하기에 익숙한 스테레오 세태가 심히 우려스럽다. 적어도 21세기, 3만달러시대, 10대 선진국에서 소통과 공감이 없는 소음들은 낯설다.
지역, 세대, 계층, 젠더를 통틀어 지금처럼 갈등 해소가 어려운 건, 우선 바람직한 인문 정신문화의 부재가 아닐까? 조심스레 교과서적 상식의 기억으로 여러 생각들을 소환하여, 나름 사례와 해결책도 모색해 보았다. 우선, 타인의 말을 듣고 나의 생각을 전하는 토론으로 반론, 소통, 공감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본이 아닐까? 토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토론없는 문제해결도 없다는 것은 이 시대 모두의 상식이다.
지구가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당한 상식도 불과 400여년전, 갈릴레이 이전에는 화형의 금기어였고. 지구가 물체를 당기는 만유인력과 중력도 330여년전, 뉴턴에 의해 발견되었다. 17세기 중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인간의 사유와, 19세기말 신과 도덕, 종교라는 관념적 사유를 넘어선 극복하는 인간(위버맨쉬, 초인)을 강조한 니체에게서 이미, 인간정신의 위대함은 증명되었다. 결국 과학과 수학, 역사, 철학적 사유로 우리는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
흥미로운 상형문자인 동양의 한자, ‘들을 청. 聽’을 소개한다. ‘듣는다는 것’은 듣는 귀를 왕처럼 모시고, 바라보는 눈은 10개나 되는 듯 집중하고, 마음은 하나로 모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 글자로 소통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이렇듯, 문맹과 야만의 편평 지구에서 합리와 존엄을 이야기하는 원형지구의 삶은 분명히 다르다. 해묵은 얘기지만,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의 울산은 특히, 남다른 도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도 압축 성장의 결과, 크고 작은 공과 실은 있지만, 아직도 울산은 특정 공업지구, 산업도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 울산 시립박물관에는 공업지구 6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60여년 전 꿈을 찾던 전국팔도의 젊은이들이 산업역군이 되어 산업수도의 역사를 썼다. 이제 그 후예들이 공업지구 60년의 헌신과 업적을 존중하고 부활시킬 것을 확신한다. 4차 산업혁명이란 문명 대전환기를 맞아 구조적인 도시의 문제점을 우선 순위별로 도출하여 리더와 지역 공동체가 토론의 격론장을 조성, 함께 해결하는 시대를 보고 싶다. 코로나와 온라인의 시대라지만, 온라인은 비접촉으로 운영하고, 120만 시민이 이용하는 울산 시청광장이 도시의 주요 사안을 격렬하게 토론하던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으로 개방되어 격의 없는 갈등 분출과 해결의 장이 되길 희망한다. 운영의 묘는 지방 정부와 리더의 그릇과 의지에 달려있다.
갈등은 현장을 찾고 널리 중론을 모으는 참여의 장에서 해결된다. 슬기로운 원형 지구, 울산생활! 인문정신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행동으로 보고 싶다.
이죽련 중구청소년문화의집관장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