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28)]길 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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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28)]길 위의 풍경
  • 경상일보
  • 승인 2022.05.0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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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길 위에서 생각의 무게를 줄이고 내면의 평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언제라도 길을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한다. 이들은 같은 길을 걸어도 늘 새로운 기분을 느낀다. 배경이 계절 따라 조금씩 바뀌기도 하지만 길을 몇 번 걷는 것으로 주변 풍경을 속속들이 다 눈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걷는 사람의 몸 상태나 마음가짐이 같은 풍경을 두고도 다른 정서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까닭도 있다.

제주 바다의 검은 바위는 계절에 따라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흐린 겨울에 보는 검은 바위는 혼자 걷는 사람의 발걸음을 빠르게 만든다. 인적이 드문 길에서는 더욱 그렇다. 요즈음과 같은 봄날에는 검은 현무암이 푸른 바다 빛깔을 한층 밝고 투명하게 한다. 그래서 바위에 앉으면 몇 번이나 망설인 후 일어나게 된다. 숙취로 속이 쓰린 날에는 파도가 일렁이는 가까운 바다 보다는 멀리 보는 바다가 편하다.

길 위에서는 자연뿐만 아니라 지나치는 사람도 정서를 자극하는 풍경의 일부다. 제주의 바닷가 길은 혼자서 걸어도 별로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혼자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초로의 남성들이 많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함께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부이지만 친구들도 많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친구 사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이들은 밝고 높은 소리를 내며 소풍가듯이 걷는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망설임 없이 부탁하는 사람도 이들이다. 이런 부탁을 받는 날은 덩달아 기분이 가볍다.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는 마주침도 있다. 허리가 꼬부라져 가는 늙은 아내와 함께 바닷가 길을 걷고 있는 노인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새로 장만한 운동화와 등산 점퍼를 입고 조심조심 천천히 걸어가는 노부부의 걸음걸이는 경건해 보였다. 새로운 풍경에 대한 감동이나 기쁨을 찾기보다는 하나의 의식처럼 조심스럽게 길을 걸어가는 그들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무엇이 저들을 이리로 오게 했을까. 머리가 허연 자신의 입장을 망각하고서 걷기의 즐거움과 나이의 관계를 한참 동안이나 생각하였다. 지금도 그 노부부가 무엇을 보고 돌아갔을까 궁금하다. 나이 들어 생기는 쓸데없는 안타까움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에서 가볼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는 않을 거라는 동병상련의 정서가 바탕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제부턴가 앞에 남은 시간들을 공간적인 경험으로 바꾸어 헤아리는 버릇이 생겼다. 언제쯤이나 오래 상상해온 그 곳에 한 번 가볼 것인지. 언제까지 내 몸과 마음이 새로운 장소에 대한 기대를 온전히 간직할 수 있을까. 이러한 기대와 안타까움은 길지 않은 미래의 시간들을 끊임없이 시각적 경험으로 채색한다. 이러한 습관은 미래의 시간이 불확실 할수록 더욱 절박해진다.

은퇴 즈음 철학 공부를 시작한 만학도에게 철학적 사유 방법을 지도해 준 젊은 교수가 갑자기 큰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것도 예후가 좋지 못한 암이라고 한다. 너무나 황망한 일이라 어떻게 안부를 물어야 할 지 망설인다. 그의 회복을 바라는 간절함을 다만 이렇게 표현할 뿐이다. ‘교수님 독일 자동차 여행을 꼭 한 번만 더 합시다.’ 젊은 교수는 당연히 가야한다며 어디로 가고 싶은 지를 묻기도 한다. 몇 해 전 그는 지도하는 학생들을 승합차에 태우고 자기가 유학한 독일의 곳곳을 순례하였다. 그 여행에 참여한 학생들은 지금도 만나면 어김없이 그가 안내한 독일의 구석구석으로 다시 돌아간다. 젊은 지도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앞으로의 미래는 공간적이다. 독일의 아우토반을 다시 달리는 것이 가장 절실한 미래의 모습이다.

가보지 못한 장소는 공간적인 미래라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새로운 장소에 서는 일은 머릿속의 풍경을 바꾸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도 안다. 눈을 감고 누워서는 일어나는 생각을 감당할 수 없어도 걷는 동안에는 어떤 마음의 상처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바닷가 길에는 흐린 날에도 혼자 걷는 이들이 많다.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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