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5월, 말없는 나무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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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5월, 말없는 나무를 생각한다
  • 경상일보
  • 승인 2022.05.3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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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해 시인·울산문인협회장

어버이날을 맞아 겸사겸사 고향을 다녀왔다. 5월에 접어든 농촌은 감자며 땅콩, 대파, 옥수수, 마늘 같은 농작물이 그득히 성숙해 가고 있었고 최고의 밀원(蜜源) 아까시나무는 올해 대거 실종된 벌들을 기다리며 짙은 향내를 뿜어대고 있었다.

필자의 향리에서 조금 떨어진 이웃 면(面)에는 700년 수령의 노거수 ‘석송령(石松靈)’이 있다. 오랜 세월 세상의 희로애락을 다 받아들인 이 반송(盤松)은 늘어진 가지마다 시멘트 목발을 짚고 서 있지만 천연기념물 제294호로, 세금 내는 ‘부자나무’이다.

긴 세월 멀리까지 송홧가루 부지런히 퍼뜨리며 환난의 세월 견뎌냈을 그 소나무를 보면 늘 자식을 위해 모든 것 다 내어주는 세상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사람을 반겨준다.

필자는 가벼운 운동 삼아 산을 자주 오르는데, 5월의 녹음은 짙고 건강하여 그 속을 걸으면 엄청난 산소와 피톤치드가 온몸으로 스며듦을 느낀다.

그런데 불과 두 달 전, 집 근처 등산코스에 산불이 나서 숲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일부 구간을 지날 때는 정말 속이 타는 듯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작은 실수 하나로 수십 년 가꾼 수목이 일순간 사라져 버리는 허망함은 현장을 지나다녀본 사람들은 다 느낄 것이다.

지난 3월 울진, 삼척에서 큰 산불이 발생한 적이 있다. 9일 동안 불이 잡히지 않아 지역 농민의 송이밭이 전소(全燒)한 것은 물론 산림 피해 지역이 서울 전체 면적의 3분의 1이 넘는 규모라고 한다. 축구장 3만 개 넓이가 불탔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금강송 숲이 참담한 숯으로 변했는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나무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도 점점 사라져간다는 소식도 들린다. 벌거숭이 민둥산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조림사업을 통해 가꾸어놓은 숲이 더는 훼손되지 않도록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산림녹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곡식을 심는 것은 1년을 위한 것이지만 나무를 심는 것은 최소 10년을 내다보아야 하는 일이다.

미국 작가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생각난다. 그 나무는 철없는 소년에게 잎과 그늘, 사과 열매를 주고 그네를 타게 해 주었다. 나이가 들어 결혼할 때는 집을 짓도록 가지를 제공했으며 어른이 되어 먼 데로 떠나고 싶다고 했을 때는 배를 만들 수 있도록 큰 줄기를 베어주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고도 소년이 늙어 자신을 찾았을 때 마지막으로 앉아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남은 그루터기를 내어주며 한없는 행복감에 잠긴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짝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후박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진달래를 내려다보되 깔보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보되 부러워하는 일이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후략)’

나무의 삶과 그 철학을 잘 표현하고 있는 수필가 이양하(1904~1963)의 ‘나무’라는 글이다.

나무는 흔히 사람에 비유된다.

5월은 묘목같이 파릇파릇한 ‘어린이날’,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어버이날’, 든든한 느티나무 같은 ‘스승의 날’,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연리목(連理木) 같은 ‘부부의 날’이 있는 가정의 달이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들을 기리는 달이다.

올해도 나무처럼 푸르고 싱싱한 ‘감사의 달’ 5월이 또 그렇게 가고 있다.

권영해 시인·울산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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