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29)]버려도 좋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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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29)]버려도 좋을 것들
  • 경상일보
  • 승인 2022.06.0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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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남긴 한마디의 말이 그 사람의 일생을 오롯이 담아내는 흔적이 되기도 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 말을 통해 한 생애의 모습을 짐작한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소설가 박경리가 생전에 그의 삶을 정리하면서 한 말이다. 이 한마디는 그가 남긴 유고 시집의 제목이 되었다. 많은 작품 속에서도 드러나지만 선생의 삶은 우리 역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경험한 평탄하지 않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예술적인 감동과 더불어 역사적 현장을 새롭게 창조하는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문학작품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접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까닭이다.

대하소설 <토지>가 대표적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자기의 삶보다 10년은 더 살아낸 것 같은 느낌을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박경리 선생은 이 소설을 통해 현실적인 공간보다 더 깊은 생동감을 주는 예술적인 현장을 만들었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가 그곳이다. 지금도 평사리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소설 속의 무대 최참판댁이다. 현실적인 공간을 문학작품 속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능력에 감탄할 뿐이다.

박경리 선생의 삶은 실제적인 공간에서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가 태어나 자란 통영에는 ‘박경리 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말년을 보낸 원주에서는 ‘박경리 문학 공원’을 만들어 선생이 생활한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 이러하듯이 한 인간의 흔적은 우리나라 곳곳에서 후손들이 찾아가는 공간으로 남겨져 있으나 정작 본인은 모두 버려도 좋을 것들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예술가의 삶도 이러하거늘 아무 것도 기록할 것 없는 범부의 삶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누구나 나이가 들면 익숙한 일상에서도 가벼움을 추구하면서 버릴 것을 찾는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방안 가득한 책들이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졌다. 언젠가 읽어보리라고 사들인 책들을 색깔이 변하도록 그대로 쌓아 두고도 별 생각 없이 지냈다. 그러나 점점 느려지는 독서 속도를 느끼면서 책들에 대한 욕심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쌓아 두는 것보다는 버리는 것이 더 편안할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바람과 기대가 힘을 잃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마다 함께 버려도 좋을 책들을 몇 권씩 찾는다. 그래도 아직은 시원하게 정리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눈이 가는 것이 옷가지들이다. 입을 일이 일 년을 두고도 서너 번밖에 없는 정장들을 옷장 가득 쌓아두고 있다. 버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까닭을 스스로도 명확히 가늠하기 힘들다. 혹시 정장을 갖추고 나갈 곳이 다시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남아 있다면 심각한 일이다.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결핍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아파트 단지의 의류 수집함을 지나면 생각이 많아진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책이나 옷과 같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다. 휴대폰 속에 저장되어 있는 100여개의 번호를 가끔은 돌려서 본다. 최근 4, 5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번호가 절반을 훨씬 넘는다. 그래도 쉽게 지우지는 못한다. 옷이나 책처럼 눈에 드러나지 않아서도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 할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고 예상을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대비해서도 아니다. 비록 지난 흔적일지라도 아직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소망 때문일 것이다. 또 일상을 헤쳐 나가는 힘을 이들과의 소통 속에서 얻고 싶은 희망을 아직 버리지 못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책이나 옷가지와는 달리 버리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사는 변화를 따라갈 수 있어야 새로운 힘을 얻는다. 모아야 할 때와 버려야 할 때를 아는 것이 변화에 순응하는 지혜라는 것은 자명하다. 버려야 할 때 버릴 수 있는 용기야말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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