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여론의 공론장과 미디어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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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여론의 공론장과 미디어바이러스
  • 경상일보
  • 승인 2022.06.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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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 관장

포스트디지털 시대, 미디어 환경은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월드와이드 웹이라는 온라인 세상에는 과거 보다 민주화된 공론의 장이 출현했으며, 이에 따라 레거시미디어(기존 언론매체)는 급속히 뉴미디어(디지털 언론매체)로 전환되고 있다.

필자는 약 10여 년 전에 ‘여론의 공론장’이라는 전시를 기획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아랍에서는 자스민혁명, 홍콩에서는 노란우산혁명, 광화문광장에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또한 부정한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기밀자료를 폭로하는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 사이트는 세계적인 이슈였다. 우리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야기하는 자정성, 자율성, 다양성이 보장되는 새로운 공론의 장을 맞이하는 듯 해보였다.

노암 촘스키는 20세기 매스미디어(TV, 신문, 라디오, 잡지, 영화, 광고 등의 정보매체)는 “자본과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고 했다. 매스미디어가 파워 엘리트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디지털 기술혁명은 권력집단으로부터 독립적인 소셜 네트워킹이나 디지털 미디어를 출현시켰고 새로운 매체 사회 환경을 만들어버렸다. 바야흐로 우리 사회가 대의 민주주의에서 직접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 당시 몇몇 국가권력이 온라인의 공론장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성공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한복제가 가능하고 분절화 되어있는 온라인 생태계에서 대중들은 우회접속, 디지털망명, 미러사이트 등으로 국가의 통제에 대처했다. (다음에서 지메일로, 카카오에서 텔레그램으로 망명 등등의 예를 들 수 있겠다). 중국이나 미얀마 등 몇몇 국가들도 SNS를 통제 하려고 했지만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제 예술계를 바라보자. 19세기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다양한 사회 참여적 예술을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그러한 이상은 사회주의 이념과 예술의 자본화에 의해 왜곡되었고, 예술가의 사회정치적 역할은 매스미디어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에 의한 아고라(공론장)의 출현으로 인해, 예술가들은 그들의 정치적 역할을 매스미디어로부터 되찾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시기에 웹아트, 인터렉티브아트, 비디오아트 등등, 디지털매체를 활용하는 다양한 공공 예술가들(나탈리 북친, 블레스트 시어리, 스페이스 하이제커 등)이 출연하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필자가 2010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기획한 ‘여론의 공론장’ 전시는 이러한 미래의 희망을 가늠해보는 전시였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 의심을 갖게 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 필자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미디어바이러스’라는 전시를 기획하게 된다. 이 전시는 “디지털 세상의 공론장이 진정 자본과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가?” 라는 물음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 사회는 댓글조작, 십알단(십자군 알바단), 조회수 조작, 매크로, 킹크랩 등등, 새로운 사건들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다. 과거 일인 권력자의 압력에 의한 탑 다운 방식으로의 언론 통제가 아닌 다수 대중을 동원한 다운 탑 방식의 여론 조성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시의 제목인 ‘미디어바이러스’는 과거 매스미디어 시대의 정보교류 방식인 영향과 간섭에서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는 전이와 감염로 변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과거 매스미디어 시대에는 특정 권력집단이 조작된 지식, 정보로써 우리를 통제하려들 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었고 그에 대해 저항을 할 수 있었다. 또한 누가 우리에게 잘못된 권력을 행사하는지 그 대상을 정확히 구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포스트 디지털 환경은 정보와 지식의 허와 실을 자정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우리의 인지력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미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의도적인 정보 기류에 나 스스로가 감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전이되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우리는 다가올 미래가 민주적 유토피아가 아닌 반민주적 디스토피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되었다. 예술에 있어서도 러시아 아방가르드, 민중미술 등 저항의 미학은 이제 의심의 미학으로 진화해야만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포스트 디지털시대에 우리는 자기중심의 주체성을 더욱 성취하게 될수록, 보다 냉철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아야만 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항상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해왔다는 믿음과 함께 소프트파워, 즉 예술의 힘을 다시한번 믿어볼 필요가 있겠다. 예술이야말로 타자의 관점에서 서로서로의 진솔한 감정들을 공감 시킬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매개체이자 진실한 매개자이기 때문이다.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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