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시작이다. 개학이다. 개학을 앞둔 2월, 학교는 본격적으로 한 해를 준비한다. 사람들은 1월, 한 해를 시작하며 새해를 다짐한다. 학교에 있는 우리는 3월, 개학을 맞이하며 다시 본격적으로 한 해를 시작한다.
시작하는 학교는 설렘이 가득하다. 서로를 배려하는 움직임도 따스하다.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한동안 지속된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아이들은 새 학급에서 새 담임, 새 친구를 만난다. 교사들은 누군가를 떠나보낸 자리에 다시 누군가 반갑게 맞이하며 새롭게 업무를 시작한다. 한 해가 시작된다.
담임으로 아이들을 만나며 나는 아이들의 현실에 집중했다. 내가 근무해 온 학교는 일반고등학교다. 그곳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대학입시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위해 수업하고 독려하고 자율학습 감독을 했다. 이뤄야 하는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도록 아이들의 성적을 챙기고 마음을 챙기며 입시라는 시간을 함께했다.
교사를 하는 내 또래나 선배들의 경우 현실적인 삶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교사가 된 경우가 많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사명감이 투철하고 교사로서 자질이 충분하다. 다만 현실에 대한 인식이 좀 더 현실적이었다. 내가 그랬다. 아이들의 현실에 집중했다. 아이들의 현실을 챙기는 나의 시간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늦은 밤까지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은 무거운 몸으로 퇴근을 하던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뿌듯했다. 그러나 교사로서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교사가 되어 다시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아이들과 함께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변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나는 최선을 다해 현실에 충실한 교사였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당연히 소중하다. 나의 시간을 아이들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낸 나의 시간에는 비전이 부족했다. 가능성이 배제되었다. 현실이라는 전제 속에 갇혀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함께 ‘그러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는 힘이 필요하다. 야간자율학습은 획일적인 시간 운영이라는 폐해가 있는 시스템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을 운영했던 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었고 그러지 말아야 했던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학교 운영 시스템을 변화시켰다. 더 이상 우리는 강제로 야간에 학교에 남아 있지 않다.
‘전제’는 우리를 구속한다. 드러나지 않으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 판단의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전제를 넘어서면 그곳에 다른 길이 있다. 학교는 전제를 넘어 언제든 다른 길을 볼 수 있도록 생각하는 연습을 이끌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현실적인 인식은 중요하다. 현실은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 갇혀 있는 인식은 충분하지 않다. 현실이 삶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현국 학성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