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혈세, 국론분열, 그리고 사법 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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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혈세, 국론분열, 그리고 사법 리스크
  • 경상일보
  • 승인 2023.03.1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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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희 미국변호사

소셜 네트워크(SNS)는 왜 지금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 누구나 쓸 수 있고, 볼 수 있고, 퍼 나를 수 있는 이 신기한 문명의 도구는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에 힘입어 언젠가부터 나와 다른 생각을 만날 기회보다 내 생각만을 더 강화시킨다. 소셜 네트워크를 작동하게 하는 기술이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전에도 다른 나라나 지역 출신들을 부르는 멸칭과 혐오의 표현들은 마치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인 양 사람들 사이에 꾸준히 만들어지고 쓰여왔다. 소셜 네트워크는 여기에 더해 사람들이 이전보다 쉽게 세상에 없던 병든 말을 만들어 퍼뜨리거나, 기존의 말을 의도적으로 특정 맥락 속에 빠뜨려 원래 뜻대로 쓸 수 없게 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후자의 한 예가 혈세(血稅)이다. 이 말은 원래 19세기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후 근대적인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 징병제를 시행하는 와중에 병역의 의무를 설명하는 비유였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반대급부 없이 강제 징수되어 조성된 정부 재정으로서 집행 시 아주 높은 수준의 정당성을 요구받는 공공 재원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재정지출이 수반된 정책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이 자신이 수행하는 직무의 정당성을 감상적으로 과장하거나 혹은 반대로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정부 재정이 지출되는 것을 비난하는 수사가 되었다. 혈세라는 말을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낭비’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론분열이라는 말도 같은 경로를 거쳐 이제는 일정한 의도를 전제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국가적 위기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구성원 의사의 총합이 방해되는 상황을 총칭하는 이 말은, 오늘날에는 권위주의 정부가 퇴행적인 프로파간다를 시민들에게 내놓는 상황 또는 나의 주장에 대한 격상과 동시에 남의 주장에 대한 엄숙주의적 비난이 필요한 상황 하에서라는 용례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렇게 원뜻에서 멀어진 단어 목록에, 최근 ‘사법 리스크’라는 말이 새로이 추가되었다. 정치 뉴스에서 보이기 시작한 이 단어가 널리 사용되는 것에 내가 놀란 이유는, 대중적으로 쓰이기에는 많이 전문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법학에서 리스크(das Risiko)라는 말은 보호법익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공법상 용어인데, 학문적 유래인 독일 경찰행정법상 위험의 3단계 모델에서는 질서 침해라는 결과 발생의 개연성이 높은 위험(die Gefahr)과 행정력이 개입하지 않고 그 결과를 감수하게 하는 잔존위험(das Restrisiko) 사이의 발생이 불확실한 위험을 가리킨다. 이러한 리스크에 대해 국가는 해당 위험에 처한 국민을 보호할 헌법상 의무 즉, 해당 국민의 안전권을 보장해야 할 법적 의무를 부담하게 된다.

위의 의미만으로는 특정한 맥락을 전제한 사법 리스크라는 말의 의미를 해석해 내기가 불가능했다. 가까스로 이해한 이 말의 뜻은 표면적 이유와는 별개로 현존하는 권력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처벌될지 모르는 위험 정도인 것 같은데, 이러한 상황은 수사·소추기관인 행정부와 심판기관인 사법부가 삼권분립에 반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초헌법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훼손이 이 정도로 심각해졌는데 이를 리스크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협소하고 안일하지 않은가. 영미법상으로도 사법 리스크(judicial risk)는 불법행위 시 법원의 판결을 거쳐 채무이행이 현실화될 위험이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법 시스템의 작동 결과를 설명하는 말일 뿐이며 이마저도 위법 행위로 인해 불이익 처분에 노출될 위험을 뜻하는 리걸 리스크(legal risk) 또는 컴플라이언스 리스크(compliance risk)에 비하면 사용 빈도가 미미할 만큼 잘 쓰이지 않는다.

세련된 전문용어인 듯 하지만 출처도 의미도 불분명한 이 말은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하는 괴이한 신조어이다. 혹시 바로 이게 이 말을 만든 이들의 의도가 아닐까. 덕분에 단순 명료하였을 관련 사실은 한층 흐릿해졌고, 시민들은 참여자가 아닌 진실 공방의 단순한 관전자가 되었다. 우리의 말이 오해가 아닌 이해의 매개체가 되도록 조금 더 의식하고 돌아보아야겠다.

이준희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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