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한 복판 한 공간 양 옆에서 ‘야당 대표 구속’ 집회와 ‘대통령 퇴진’ 집회가 동시에 열린 일이 있다. 어느 쪽이 옳은지 분명한데 다른 한쪽은 진실에 눈을 감고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몇 년전 조국사태 때도 서초동 검찰 청사 인근에서 비슷한 풍경이 벌어졌다. 통상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이 잘 보이고 듣고 싶은 것을 잘 듣는다고 한다. 음악도 아는 곡을 들으면 감동이 더하다. 확증편향이 있다지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보를 선택적으로 모으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 떼쓰는 모습은 우매하고 이기적이다.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편파적 위선적 주장을 하면서 궤변을 서슴치 않고 파렴치한 행태를 보여주는 장면은 지성의 퇴락을 잘 보여준다.
갈등을 해결하거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정치에서 이러한 현상이 심하다. 집단적인 집회 시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릇된 신념과 사익에 매몰되어 편파적 주장을 늘어 놓게 되면 대화와 타협은 불가능하다. 상대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입장만 고수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게 될 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읽었던 오쇼 라즈니쉬의 유머집에 실린 ‘객승과 애꾸눈 스님의 선문답’ 에피소드다. 라즈니쉬는 크리슈나무르티 등 인도의 영적 신비가들에 대한 관심이 유행하던 1980~1990년대에 활동한 인도의 구루(스승) 내지 철학자다. 사이비 논란도 있었지만 통찰을 담은 유머는 촌철살인이다. 다음과 같다.
불가에서는 객승이 떠돌다가 저녁때가 되면 지나던 길의 절에 들러 그 곳 스님과 선문답 내기를 하고 이기면 하룻밤 묵어가고 지면 그냥 가는 풍습이 있었다. 어떤 객승이 형제 스님(형은 용모가 수려하고 학식과 인품이 뛰어났으나 동생은 애꾸인데다 성질이 고약하였다)의 절에 들렀고 형 스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동생 스님과 선문답을 하게 되었다. 객승은 선문답 내기 후 황급히 절을 떠났는데 때마침 뒤뜰에서 나오는 형 스님을 만나 “동생 스님은 정말 대단하오. 선문답에서 내가 완전히 졌소”라고 말했고 형 스님이 이유를 묻자 객승은 “동생 스님과 마주 앉아 선문답을 하는데 내가 부처(佛)를 가리키는 뜻으로 손가락 한 개를 내밀자 동생 스님은 ‘부처(佛)와 동시에 법(法)을 보여주겠다’면서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고, 내가 삼보 불법승(佛法僧)의 의미로 손가락 세 개를 쳐들자 동생 스님은 ‘불법승(佛法僧) 셋이지만 결국 모두 하나로 통한다’는 뜻으로 주먹을 내 코 앞에 들이대었소. 동생 스님의 법력이 대단하오. 내가 졌소”라고 대답하고 총총히 떠났다.
객승이 떠난 뒤 마침 동생 스님이 마당으로 나오는데 화가 난 모습으로 씩씩대기에 형 스님은 “무슨 일이냐. 너가 선문답에서 이겼다던데”라고 묻자 동생 스님은 “그 객승 참 나쁜 놈(!)이오. 놀려도 유분수지. 내가 애꾸눈이라서 눈이 하나라고 놀리며 손가락 한 개를 내밀기에 기분이 나빠 ‘그래 너 눈은 두 개다’라고 하면서 내가 손가락 두 개를 내밀자 한술 더 떠 ‘너 눈 한 개에 자기 눈 두 개 합하면 세 개다’라고 하면서 손가락 세 개를 내밀어 놀리기에 너무 화가 나 ‘더 이상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주먹을 객승 코앞에 갖다 대니 가버렸어요. 정말 못된 중이다”라고 말하였고 형 스님은 듣고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같은 상황을 어쩌면 이렇게 다르게 인식할 수 있을까. 재미있지만 우스꽝스럽다. 우화는 극단적인 비유일 수 있지만 아집에 사로잡힌 인간의 우매함을 풍자하고 있다. 세상사 원하는 대로 될 수 없고 진실과 사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이념의 틀안에 안주해 황당한 언동을 하고 집단적으로 이를 표출하는 것은 사회적 해악이다. 그러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불행하다. 합리적 이성의 간지(奸智)가 작동하지 않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 혹시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 한번쯤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박기준 변호사 제55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