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38)]주술과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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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38)]주술과 이성
  • 경상일보
  • 승인 2023.03.1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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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설 명절을 쇠고 나면 예전 농촌의 어머니들은 한 해 신수를 보러 갈 곳을 정해야 했다. 신수를 잘 보는 용한 점쟁이는 대부분 멀리 있었다. 근동에도 점을 치는 사람은 있었지만 한 해의 운수를 서로 사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묻는다는 것이 미덥지 못했을 것이다. 적지 않은 복채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소문난 점집을 찾아가서 온 가족의 신수를 보고 오는 일은 한 해를 시작하면서 치러야 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것도 한해의 점괘가 온전히 드러나는 정월 보름이 지나기 전에 해결해야 하는 급한 일이었다. 한 해의 신수에 나타나는 예지력의 범위는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동쪽에는 액운이 있다거나 어느 달에는 물을 조심해야 한다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들은 구체적인 큰 액운이 없다는 것을 한 해를 지키는 위안으로 삼았다. 그리 먼 옛날의 이야기도 아니다.

과학과 합리적 이성을 앞세우는 이 시대에도 그 명맥은 그대로 이어져 있다. 다만 이름이 시대정신에 맞게 변형되었을 뿐이다. 점집이라는 명칭보다는 철학관이나 명리학연구소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찾아가는 사람들도 평생 자기 마을을 크게 벗어난 경험이 없는 촌부들이 아니라 스스로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그러나 예지력의 깊이나 범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자식이 흰 가운을 입고 지낼 팔자라는 말에 큰 힘을 얻고 살아가는 부모를 주위에서 보았다. 흰 가운의 의미는 그 부모만이 짐작하고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과학적인 법칙을 이해하고 역사적인 지식과 소양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도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일상 속에서는 남다른 판단력과 현실적인 지혜를 발휘하면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무속인들의 언어를 빌어 예측하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흔하다. 이보다 더한 경우도 있다. 국내 현실 뿐만 아니라 세계정세의 흐름을 꿰고 있는 정치인이나 경제인들도 중요한 일을 무속인의 말에 의존해 결정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오래된 소문이지만 믿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확인된 사실이다.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일상생활에 대한 지혜는 넘칠 정도로 많다. 보통 사람들도 자기 몸에 좋은 운동과 음식에 대해서는 전문가보다 치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사회현상이나 정치현실에 관해서도 나름대로의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확고한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장 확실한 죽음에 대해서는 아예 판단을 유보하고 회피한다. 신화나 종교가 관장하는 영역이다.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인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타협하는 대응논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지탱하는 큰 줄기는 과학과 그것을 발견하는 능력인 합리적 이성이다. 근대의 이러한 정신적 특징을 ‘탈주술화’라고 명명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말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생각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자기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곳에 있는 무엇인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막스 베버도 자신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모든 주술로부터 벗어난 개인이 바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창조한 주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문명과 체제가 앞으로도 존속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이성적인 힘이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특히 지도자는 이성의 힘이 남달라야 한다. 자신의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의 미래도 만들어 갈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능력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차원에서의 논의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이 시대의 문명은 개인의 합리적 이성이 만들어 낸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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