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저명한 도시계획가인 케빈 린치는 그의 저서 <도시의 이미지(the image of the city)>에서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5가지 요소로서 경로, 경계, 지역, 결절점, 랜드마크를 제시했다. 랜드마크란 탐험가, 여행자가 특정 지역을 돌아다니던 중에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그 뜻이 더 넓어져서 건축이나 상징물, 동상 같은 조형물 등이 어떤 곳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의미를 가질 때 랜드마크라고 부른다. 자주 인용되는 사례이지만 프랑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성가족의 교회와 구엘공원 등을 보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한다는 사실은 랜드마크 건축이 가지고 있는 가치 그리고 그것이 도시 이미지에 끼치는 영향력을 증명하고 있다.
건립초기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이제 서울의 랜드마크 건축 중 하나가 되었다. 서울이라는 오랜 역사와 많은 인구 그리고 거대한 경제력을 가진 도시에는 다양한 유형의 수많은 랜드마크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랜드마크 건축으로서 DDP의 존재감은 특별한 듯하다. DDP 설계공모심사위원회가 “도시의 랜드마크가 건축의 높이보다 디자인이나 특성이 있는 문화콘텐츠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밝힌 작품 선정의 이유가 현명한 판단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자하 하디드는 여성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이다. 프리츠커상은 1979년에 미국인 사업가인 제이 프리츠커와 그의 아내 신디 프리츠커에 의해 설립된 상으로 이 가문이 운영하는 하얏트재단에서 매년 ‘건축예술을 통해 재능과 비전, 책임의 뛰어난 결합을 보여주어 사람들과 건축환경에 일관적이고 중요한 기여를 한 생존 건축가’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현대 건축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건축가들이 이 상을 수상했다. 수상자 명단을 살펴보면 1979년 초대 수상자인 필립 존슨에서부터 2023년 데이비드 치퍼필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건축, 디자인 관련 문헌에 등장하는 대단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다. 지금까지 46명의 수상자 중 미국과 일본이 각각 8명의 최다 수상자를 배출했다는 것과 한국, 일본, 중국 중에서 한국에만 이 상의 수상자가 없다는 점도 흥미롭다. 세계의 유명한 도시에는 당연히 이들이 설계한 건축들이 있고, 이 건축을 보고 공간을 경험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도시를 방문한다.
당연히 우리나라에도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많은 건축가들의 건축물들이 있다. 2023년 수상자인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2018년 아모레퍼시픽 사옥의 설계를 통해 우리나라에 그 이름을 알렸고 최근에는 서울 성수동에 새로운 건축을 설계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수상자인 안도 타다오(유민미술관, 본태박물관, LG아트센터), 노먼 포스터(한국타이어), 알바로 시자(군위 사유원), 렘 쿨하스(서울대학교 현대미술관, 갤러리아 광교), 프랑크 게리(루이비통 메종 서울), 장 누벨(리움 미술관), 리처드 로저스(여의도 파크원)의 건축도 우리나라의 곳곳에서 그 건축적 특별함을 보여주고 있다. 프리츠커 수상자는 아니지만 세계적 명성의 다니엘 리벤스키(현대산업개발사옥, 해운대 아이파크), 도미니크 페로(이화여대 ECC), 마리오 보타(강남 교보타워, 남양 성모성지대성당)의 건축도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
특이한 것은 많은 기업체들이 건축의 거장들에게 그들의 사옥과 미술관 그리고 전시관 등의 건축설계를 의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거장들에게 건축설계를 의뢰하는데 있어 재정적으로 자유로운 기업체의 건축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투자만이 세계적인 수준의 건축물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현실적인 방법인 듯하다. 울산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체들의 사옥과 산업시설들이 세계적인 건축 거장들의 손길을 거쳐 울산의 랜드마크 건축로 지어진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세계적인 도시라고 자부하는 울산에 세계적인 수준의 건축 하나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제, 울산에도 세계적인 수준의 랜드마크 건축이 있어야 한다.
이규백 울산대학교 교수 울산공간디자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