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80)]사막에서 길을 찾다, 페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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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80)]사막에서 길을 찾다, 페트라
  • 경상일보
  • 승인 2023.04.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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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페트라가 대중적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3- 최후의 성전 편에 등장하는 암벽 사원의 장면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그곳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사용한 성배를 감추어놓은 장소로 등장한다. 물론 허구의 상상력이지만 성물이 감추어진 신비로운 장소로서의 이미지는 공감을 얻을 만하다. 그 장소가 바로 요르단 안에 실재하는 고대 유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신비로움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후 페트라는 요르단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며, 최고의 관광자원으로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실상 페트라에는 암벽 사원(알카즈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페트라는 고대도시 유적을 총칭하는 지명이고, 알카즈네는 그 유적 중 일부일 뿐이다. 그곳에는 사원만이 아니라, 분묘, 경기장, 극장, 왕궁, 주택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그것도 기원전 4세기경 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친 도시 유적들이 망라돼 있다.

암벽 사이에 난 협곡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그리스-로마 신전의 웅장한 장면은 신비로움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공간적, 건축적 장치가 된다. 이 도시를 건설했던 사람들은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아닌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왜 이 협착한 바위 협곡에 도시를 만들었으며, 어떻게 그리스-로마 형식의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단 말인가. 이 장소를 좀 더 넓은 스케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없을 것이다.

▲ 요르단 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막 와디 럼(Wadi Rum).
▲ 요르단 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막 와디 럼(Wadi Rum).

시나이반도는 이집트와 아라비아반도를 연결하는 삼각형 땅이다. 시나이반도를 건너 아라비아로 들어서는 길목에 오늘날의 요르단이 소재한다. 이집트와 중동, 그리고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그 길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열려 있었다. 1만2000년 전 낙타와 가축을 끌고 이 길을 지났던 구석기 인들의 모습이 암각화에 남아있다. 유대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도 이 길을 지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요르단 강 유역에 펼쳐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그들은 40년을 걸어갔다. 하지만 그 길은 험준한 돌산과 황무지 사막을 건너야 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와디 럼(Wadi Rum)은 요르단 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막이다. 사막이라기보다는 기암괴석의 사암 산맥으로 이루어진 사막 계곡과 분지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붉은 모래와 돌산의 절경은 결코 지구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경이롭다. 오죽하면 영화 마션(Martian)에서 화성의 모습으로 연출되었을까. 우주 기지처럼 꾸민 관광객용 숙소의 모습도 그리 생경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형형색색의 산 사이로 붉은 빛 모래사막이 거대한 바다처럼 이어진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처럼 ‘숨겨진 우물’과 ‘여우’를 만날듯하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우물이 없어도 넋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사막이다. 그러나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위험한 공간이다. 사막에서 우물은 생명이며, 희망이며, 기원이다. 유목민도 카라반도, 모세도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황홀하게 펼쳐지는 와디 럼의 절경은 바람이 깎고 모래가 다듬은 작품이다. 이곳에서 시간의 개념은 인간의 잣대를 넘어선다. 자연은 이것을 만드는데 수억 년을 공들였을 것이나, 인간이 이를 허무는데 수십 년이면 족하지 않을까. 유네스코의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와디 럼 보호구역(Wadi Rum Protected Area)으로 보존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와디 럼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거대한 바위 산맥지대가 나타난다. 와디 아라비아 사막의 가장자리다. 사암으로 이루어진 산맥들 사이에 좁은 협곡들이 형성되었다. 이 협곡은 사막의 위협적인 환경을 피해 통행할 수 있는 안전한 길이 되었다. 사막의 열사를 피할 수 있고, 도적으로부터 은신할 수 있으며, 물을 보관할 수 있는 천혜의 교통로가 된 것이다. 이 길의 통제권을 바탕으로 발전한 신기루 같은 문명, 바로 페트라를 만든 나바테아 문명이다.

유목민이었던 나바테아인들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기원전 4세기경으로 알려진다. 지중해 이집트, 근동, 아라비아, 인도를 이어주는 교역로에 정착한 그들은 면화, 유향, 몰약 등 희귀 향신료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문명을 일으켰다. 깊은 협곡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길이 되고, 물길이 되고, 도시의 터전이 되었다. 이토록 협착한 협곡 속에 만들어진 도시가 바로 페트라(Petra)다. 페트라는 1세기까지 인구 3만5000명을 수용하는 대도시로 성장해 갔다.

이 건조한 사막지대에 정착해 도시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물의 생산과 관리가 필수적인 요건이다. 그들은 우기에 내리는 작은 빗물을 모으는 정교한 집수장치를 만들었고, 바위 암벽을 파서 거대한 저수조를 축조했다. 또한 협곡을 따라 수로를 건설해 증발을 최소화하고 배분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페르시아인들이 구축한 카레즈 수로, 로마인들의 수도교, 중국인들의 대운하에 이르기까지, 물길을 만드는 것은 도시 문명의 원천이다. 사막 한가운데 길목을 차지하고 물까지 확보했으니 문명이 번성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페트라는 국제도시였다. 교역을 통해 외래 상품만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선진 문명들도 들어왔다. 이 협곡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시 문명과 건축을 만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이점은 한편으로 외부세력의 공격을 받기도 쉬운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2세기 초에는 로마제국에 흡수 합병되었고, 7세기에는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주인 없는 문명은 쇠퇴하기 마련이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나타났던 나바테아 문명도 전설같은 역사만 남긴 채 사라졌다. 잊혀진 도시 페트라가 재발견된 것은 겨우 19세기의 일이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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