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은 인류에 있어 특별하다. 100은 전체이자 완성의 의미로 백일잔치, 백세시대, 백주년 기념, 백성(百姓), 100℃ 등 그 쓰임새가 참으로 다양하다. 이렇게 구구절절이 읊는 것은 그만큼 100이라는 숫자는 여러 고비를 넘기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 된다고 해석하고 싶어서이다.
그런 귀한 백년의 세월을 지나온 학교는 어떤 의미일까? 올해 필자는 상북초 소호분교의 100주년 기념행사에 다녀왔다. 1923년에 사설강습소로 개설된 학교는 아직도 분교의 명맥을 유지하며 그 마을의 명실상부한 타임캡슐이 되고 있었다.
언양초등학교에 아버지는 29회 졸업생이고, 필자는 60회 졸업생이다. 또 거슬러 할아버지 대에 형제자매분들도 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 가계의 대부분이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창생인 셈이다. 한 집안의 가계도를 정리한 족보가 있다면 학교는 사회생활의 첫 기틀이자 공동체 정신이 형성되는 역사관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내가 만지고 느낀 모든 사물을 아버지도 만졌을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 또한 새삼스럽고 감격스럽다. 이렇듯 학교란 공간은 한 시대에 일어난 생생한 현장을 같이 경험하게 되고 반성도 하면서 끈끈한 결속력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수명이 늘어난 지금 누구나 100세 시대를 꿈꾼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기록이나 역사를 꼼꼼히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동창생들의 모임에서 가끔 빛바랜 사진을 카톡에 올렸을 때 이구동성 감탄한다. 아! 우리가 저럴 때가 있었지, 우리가 저랬었나? 그때 싸웠던 친구에게 미안하다. 우리 담임선생님 지금도 잘 계실까? 맞다. 그때 정말 어려웠던 친구가 대기업 회장이잖아!
그곳에서 같이 배우고 같이 성장한 친구가 나중에 큰 인물이 되었을 때 우리는 굉장한 자부심과 에너지를 얻는다. 그런 개인적인 자료를 학교가 모았을 경우 학교는 훌륭한 역사박물관이 된다. 지금 막 자라나는 아이들이 100년된 선배 동창들의 성공과 실패를 함께 공유한다면 미래 사회에 희망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현재 울산시에서도 100주년에 다다른 학교는 20곳 남짓하다. 도시가 개발되고 변화를 겪으면서 남은 곳은 시골 학교밖에 없다. 교육부는 경제 논리로 소규모 학교를 철폐하고 통합하려고만 한다. 물론 인구가 줄고 교원 배치가 쉽지 않은 사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100년이라는 모진 풍파와 고초를 겪고도 학생들을 보듬고 가르쳐온 학교마저 통폐합하거나 소멸시킨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나.
지금 우리 사회는 4차 산업혁명으로 다양한 제품·서비스가 네트워크와 연결되는 초 연결성과 사물이 지능화되고 인공지능기술과 정보통신기술이 3D 프린팅, 무인 운송수단, 로봇공학, 나노기술 등 여러 분야의 혁신적인 기술들과 융합함으로써 더 넓은 범위에 더 빠른 속도로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학교 현장교육도 사회의 흐름에 발맞추어 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학교는 어떤 모습인가. 기초학습부진, 학교폭력, 교권 추락 등 도를 넘고 있다. 서로 존중하고 공동체 의식이 부족한 것도 한몫했으리라. 필자는 교육위원장으로 몸담는 동안 학생을 위해서 학교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 그 목적으로 올 상반기에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발의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100년된 학교를 기념하고 학교 100년사를 정리해 봄으로써 학생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지역의 역사·문화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발판을 깔아주려고 한다. 동창회와 함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을 수 있는 디지털화된 역사관을 만들어 우리 아이들에게 지역 사회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1세기의 세월을 간직해 온 학교들은 분명 우리 울산의 역사로서 그 존재만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타자(他)를 나와 동등한 주체로 존중하면서 관계 맺는 일, 최초로 시작된 사회는 학교다. 학교야말로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린 곳이다. 100년 전 미래는 지금이다.
홍성우 울산시의회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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